빛으로 그린 세상

원시림, 그 아득한 품속으로 본문

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원시림, 그 아득한 품속으로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8. 22:11

- 강원도 인제군 점봉산에서


여러 생명을 품에 안고 생명시키는 숲,
왕성한 생명력으로
무엇이라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숲,
나는 그 숲의 품속에서 점점 평온해지고 한없이 고요해졌다.


 
자동차 소음 사이로 찌를 듯한 매미소리가 요란하다. 지금쯤 강선계곡에는 우렁찬 물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지고 있겠지. 해질녘, 후덥지근한 날씨를 피해 공원으로 나가보아도 바람 한 점 없다. 걷거나 뛰는 인파로 오히려 가슴만 답답해진다. 그럴수록 숲 향기 가득한 점봉산의 바람과 아늑하던 숲길과 발길을 붙잡던 풀꽃들이 그리워진다. 머물 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자꾸만 새록새록 떠오르는 건 왜일까.

더위에 지치고 에어컨 바람에 지쳐서 자연이 주는 청량한 숲의 기운이 간절해진 걸까. 점봉산 들머리인 진동리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그랬다. 한여름에 자동차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닫고 점퍼까지 꺼내 입어야 할 정도도 서늘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산봉우리마다 피어오르는 구름의 향연은 특별한 덤이었다.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여 사람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산, 옛 모습이 오롯하게 남아 있는 원시림, 점봉산은 웅숭깊은 모습으로 그렇게 다가왔다.

해가 저물어가도 도시의 열기는 쉬 사그라지지 않는다. 후끈 달아오른 아파트 숲 사이를 걸으며 곰배령으로 오르는 산길을 떠올린다.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나무들과 키 작은 고사리와 산죽들, 눈길을 붙잡는 노루오줌이며 동자꽃, 물봉선 등이 눈에 선하다. 길 안쪽에는 검고 축축한 흙과 무수한 버섯들이 원초적인 생명의 숨결을 뿜어내었다. 여러 생명을 품에 안고 생멸시키는 숲, 왕성한 생명력으로 무엇이라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숲, 나는 그 숲의 품속에서 점점 평온해지고 한없이 고요해졌다.

집에 돌아와 더위를 달래려고 캔 맥주를 마시며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댄다. 뉴스를 보다가 드라마를 보다가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하는 사이 오징어며 땅콩, 과자까지 먹고는 주체할 수 없는 배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중요한 메일을 확인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데 뉴스기사를 읽고 연예기사를 보고 쇼핑몰을 뒤지다가 ‘내가 무얼 하려고 했더라…….’ 하며 문득 막막해진다.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끊임없이 오르려는 사람들 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자신을 내맡긴 채 점점 자기로부터 멀어져가는 서글픈 자화상이다.

 ‘너 누구니?’, ‘응, 나야…….’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래…….’ 원시림의 아득한 품에서 고요 속으로 걸어가던 나는 문득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을 만났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과 가시지 않는 갈증 속에서 방황하면서도 계속 회피해왔던 나와의 만남이었다. 쑥스럽고 어색했다. 하지만 내가 부둥켜안고 살아가야할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이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욕망이 끝없이 솟아나는 도시에서 점봉산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건 그 때문일까.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인 것일까.

도시의 밤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아파트 불빛과 자동차의 불빛을 보며 진동리의 밤을 추억한다. 오랜 친구인 진동리 지인아빠와 우연한 기회로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된 강선산방 부부, 그리고 방학을 맞아 데리고 간 막내아이와 조카까지 어우러져 막걸리 잔치가 벌어졌다. 점봉산 품속이기 때문일까, 산에 깃들어 사는 어른들의 순수한 마음 때문일까. 그날 밤 진동리 별빛같던 아이들의 눈망울과 밤늦도록 산 아래에 울려 퍼지던 투명한 웃음소리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연기가 안나게 고기를 구울 수 있어요?” “아니, 도토리묵을 이렇게 쫀득하게 만드는 비법이 뭐지요?” 서로의 비법을 묻는 두 남자의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점봉산 산자락에 둥지를 틀은 그들은 농부이자, 목수이고, 산사람이자 펜션주인이지만 동시에 시인이며 예술가이다. 그들에게는 작고 사소한 일상도 소중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중요한 삶의 일부분이 된다. 아이 교육 때문에 또는 부인 직업 때문에 가족이 떨어져 지내야 하는 어려움과 산 속 생활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산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도시의 밤은 더욱 깊어간다. 지금쯤 곰배령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불빛도 없는 칠흑 같은 점봉산을 지키며 고독을 마주하고 있겠지. 어쩌면 그들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그리고 ‘자연’으로 살아가려는 인간의 마지막 보루는 아닐까. 그들의 용기를 부러워하면서도 도시가 주는 편리를 버리지 못하는 나는 세상에 휩쓸리고 유혹에 흔들리면서도 자꾸만 점봉산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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