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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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천천히 둘레둘레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8. 22:39

- 가슴으로 걷는 지리산 둘레길

반야봉, 형제봉, 제석봉, 천왕봉…….
막연히 동경하면서도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차를 타고 멀리서 바라보기에는 못내 아쉬웠던
지리산 봉우리들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문득, 묻어 두었던 그리움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나는 지금 길 위에 있다. 배낭을 메고 지도를 들고 길을 걷는다. 민박집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나선 길이다. 잔뜩 흐린 날, 아침 공기는 더 서늘하고 풋풋하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마을을 지나 고사리밭 무성한 언덕을 지나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걷는다. 서두를 것도 없고, 급할 것도 없다. 지리산 자락의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지리산 둘레길’, 나는 오늘 이 길 위의 나그네이다.

  한가로이 거닐며 해찰을 부려본다. 길섶에는 물봉선 닭의장풀 쑥부쟁이가 얼굴을 내밀고 이름 모를 여러 꽃들 사이로 나팔꽃도 보인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간신히 피어나는 작고 희미한 나팔꽃과는 달리, 빨려 들어갈 듯 고혹적인 자줏빛의 커다란 꽃이 활기차고 당당하기까지 하다. 길바닥에서 본 손가락만한 애벌레도 그렇고 매끈하게 쭉 뻗은 지렁이까지 이곳에서는 무엇이든지 특상품으로 자라나는 모양이다.

 

  길은 그곳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그대로 보여준다.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돌과 흙을 지어 나르고 땅을 일구었을 농부의 땀방울이 산비탈 층층이 다랑이 논을 이루어냈다. 오르막길에서 보면 높다란 논에 탐스럽게 열린 낟알이 익어가는 모습이 하늘에 걸려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길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은 퍽 닮아 있었다. 맛깔스러운 아침을 차려주었던 민박집 아주머니, 지리산 토종꿀을 통째로 부어 꿀차를 만들어주셨던 쉼터 할머니, 경운기를 타고 일 나가시던 마을 할아버지……, 모두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산골짜기를 지나온 바람이 온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간다. 수많은 나뭇가지와 잎을 스쳐온 바람에서 깊고 싱싱한 숨결을 느낀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인 등구재이다. 고갯길을 내려가자 드디어 지리산의 주능선이 눈앞에 아련하게 펼쳐진다. 반야봉, 형제봉, 제석봉, 천왕봉……. 막연히 동경하면서도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차를 타고 멀리서 바라보기에는 못내 아쉬웠던 지리산 봉우리들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문득, 묻어 두었던 그리움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곧 투쟁으로 느껴지던 젊은 날이 있었다. 대학동아리 선후배들하고 천왕봉에 올랐었다. 화엄사에서 출발해서 노고단부터 걸어 올라가는 4박5일 천왕봉 종주코스였다. 짐을 나눠 메고 앞사람 발뒤꿈치를 보며 그날 목표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름밤 추위와 싸우고 험난한 산길과 싸우고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대자연 앞에서 느꼈던 경외감과 정상을 정복했다는 성취감은 다시 세상과 맞서야하는 내게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며 정의를 위해 성공을 향해 달려가던 비장함은 이제 많이 무뎌지고 낡아졌다. 남들만큼 오르지 못했다는 회한도 빛바랜 삶의 무늬가 되었다. 인생은 오로지 앞만 보고 조급하게 오르는 길만 있는 게 아니라 순간을 음미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어가는 길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는 건 지나온 세월 때문일까. 하지만 그 길을 선택하기에는 아직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길은 계속 이어진다. 산봉우리를 오르는 등산과는 달리 둘레길은 정상도 없고 목표도 없다. 오르지 못할 것 같아 미리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기어이 해내겠다는 굳은 각오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길이 있고 그 길을 걷는 순간순간이 소중할 뿐이다. 단출한 배낭에 몸도 마음도 가볍다. 한 두 방울 비가 떨어지면 그대로 맞는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평평한 길도 걸으며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순순히 발길을 돌린다. 구불구불한 마을길에 붉게 영글어가는 키 큰 수수를 보며 풍요로운 가을빛으로 물들고, 울창한 숲에서 산새소리에 귀 기울이며 짙은 숲 향기에 젖어 들어간다. 

  돌아가는 길, 그윽하게 내려다보던 지리산 능선의 따스하던 눈빛을 떠올린다. 마음이 한없이 푸근해졌던 산비탈 다랑이논과 풍성한 마을 풍경, 한가로이 거닐며 눈을 마주쳤던 길가의 작은 꽃들과 작은 벌레들……. 전북 남원 매동마을에서 경남 함양 금계마을까지 십 킬로미터 남짓한 지리산 둘레길을 천천히 걸으며 참 행복했다. “천천히 둘레둘레” 익숙한 속도로 휙휙 스쳐 지나가는 고속버스 창밖의 풍경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린다. 세상의 속도에 휩쓸려 중심을 잃을 때나 오르지 못할까봐 미리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주문을 외우듯 떠올리리라, “천천히 둘레둘레……”.


글. 최경애(수필가)  사진. 김선규(생명다큐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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