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물길 본문

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물길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8. 22:06

- 서울 청계천에서

아침에 눈을 뜬 순간 막막한 느낌이 밀려올 때,
산다는 건 사막을 홀로 걷는 거라는 생각이 들 때,
나오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욱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암담함에 둘러싸일 때,
.....
나는 가방을 싼다.

 

  배낭에 수첩 하나, 볼펜 한 개, 생수 한 병을 넣는다. 미리 계획하지 않았으면 어떻고 가까운 곳이면 어떠랴. 등산화에 땀을 흡수하는 기능성 옷까지 갖추어 입고 광화문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일에 쫓기며 스쳐 지나가던 일상의 공간을 호기심 어린 눈과 천진스러운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일도 괜찮으리라. 서울에서 자란 토박이지만 나는 오늘 서울의 여행자이다. 

 

  자동차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차도 한가운데 서있는 느낌이 얼떨떨하다. 청계광장이다. 차량행렬이 꼬리를 물던 이곳에 개천이 흐른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이 나질 않는다. 가까운 곳이니까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청계천이 복원된 지도 벌써 4년이나 흘렀다. 계단을 내려가자 먼저 비릿한 물 냄새와 축축한 습기가 ‘훅’ 풍겨온다. 자동차 소리대신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이 가득하다. 대형 고층 빌딩에 둘러싸인 도심의 한복판에서부터 물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뭐야, 흙 한 줌 없잖아…….’ 청계천이 시작되는 이단폭포는 주변의 빌딩만큼이나 깔끔하게 돌과 콘크리트로 마감되어 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조금만 더 가자 콘크리트 물가에 풀이 무성하다. 물속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까지 노닌다. 심지어는 고층빌딩 사이로 백로 한 마리가 우아하게 날아간다. 조금은 뜨악하게 바라보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시멘트 위에 흙을 깔아 인위적으로 만든 물길이면 어떠랴, 막대한 비용을 들여 관리하지 않으면 저 혼자 흘러갈 수 없는 개천이면 또 어떠랴. 그곳에는 풀이 살고 물고기가 살고 또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드는 데…….

  한낮의 찌는 더위에 도심을 걷는다는 건 고역이다. 후끈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열기에 건물의 에어콘 실외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까지……. 하지만 청계천 물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볼거리에 눈을 맞추면서 물길을 따라 걷노라면 멀게만 느껴지던 거리가 훌쩍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심심치 않게 나오는 다리 밑 풍경 또한 여유롭다. 그늘 아래 앉아 발을 물에 담그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더욱 우렁차게 들리는 물소리가 한낮의 더위를 달래준다.

  새벽다리를 지나 하류로 갈수록 풀은 더욱 우거지고 무성해진다. 흙 한줌 먼지 한줌에라도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풀들은 무던히도 자라나기 마련이다. 담쟁이덩굴이 회색 시멘트벽을 푸르게 뒤덮고 물가의 부들이며 수생식물들은 어른 키만큼 자라있다. 문득 어릴 적 동네에서 놀던 개천이 떠오른다. 농사를 접고 서울로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 잡은 서울 변두리, 기찻길 옆에서 아기들은 잘도 잤고 시멘트 틈으로 자라나는 풀들처럼 변두리 좁은 골목길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푸르렀다. 여름이면 개천가에서 키를 훨씬 넘은 풀숲을 뛰어다니며 소꿉놀이를 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오랜 세월 보아왔던 낡은 청계고가도로의 잔재가 복원된 청계천에 남아있다. 복개되기 전 천변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재현해놓은 나무집도 보인다. 인위적으로나마 물길을 복원하면서 청계천에는 이제 역사가 흐른다. 그 옛날 인왕산에서부터 내려온 맑은 물이 한강으로 흘러가던 기억이 스며있고, 복개된 도로 위로 오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흔적 또한 스며있다. 그리고 콘크리트 물길에서 다시 삶의 터전을 일구는 풀과 나무와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계속 이어지리라. 

  사막을 헤매는 막막한 심정으로 훌쩍 떠나온 이곳에서 나는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어린 시절과 만난다. 언제부턴가 동네 실개천들이 모두 콘크리트로 덮였던 것처럼, 오로지 미래를 향하여 달리면서 모두 덮어 두었던 구질구질하고 땟국 흐르는 기억들, 나도 모르게 꼭꼭 묻어 두었던 그 기억들 속에 내가 찾아 헤매는 그 무엇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오르기 위하여 애쓰면서 잃어버렸던 순수와 열정이라는 물길이……. 청계천을 따라 걸으며 나는 기억의 문을 활짝 열고 어린 시절 개천에서 뛰놀던 유년의 추억으로 흘러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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