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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시간이 흐르면서 식물들의 생존경쟁은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먹이를 찾아 온 제법 큰 새들이 간간히 쉬어간다. 오래지않아 포유류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자연은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다독이며 희망의 입김을 불어 넣는다 오랜동안 시체처럼 서있던 검은 나무들은 빈자리를 만들며 하나 둘 흙으로 돌아간다
2000년 4월 온 나라가 총선의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 강원도 동해안 일대에 거대한 산불이 다시 발생했다. 고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고성 산불현장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이곳에 나비들이 날아들기 시작하고 미생물들과 미미한 곤충들이 가날픈 몸짓으로 숲을 가꾸고 있었다.
산불이 발생한 지 2년이 되었다. 국도변을 중심으로 보기 흉한 검은 숯덩이들은 대부분 베어져 트럭에 실려갔다. 인공 조림된 어린 나무들은 황량한 땅위에서 살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해가 바뀌어도 아직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곳이 있다. 당시 산불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검은 숯덩이 사이로 솟아오르는 생명의 몸짓. 그것은 인간의 실수로 무참하게 짓밟힌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였다. 주민들은 숲 만큼이나 새카맣게 타버린 가슴을 다독거리며 희망의 나무를 다시 심었다
여의도 면적의 10배가 넘는 1천만평의 국토가 소실되고 졸지에 모든 것이 재로 변했던 고성산불 현장에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탐스럽게 내린 눈은 불탄 나무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검은 산을 하얗게 감싸안지만 이내 앙상한 검은 줄기와 가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추위가 찾아오면서 식물들은 모든 지혜를 동원해 겨울을 나면서 이윽고 다가올 찬란한 봄의 향연을 준비하지만 고성산불 현장에는 인동하는 생명의 신비가 없다. 빛이 그려내는 그림자가 불에 탄 나무들의 유일한 몸짓이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매년 이맘때면 송이고장으로 불리는 고성군 죽왕면과 토성면 일대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외지로 나간 가족들이 돌아와 송이를 지키기 여념이 없었다. 다리 힘만 있으면 이산 저산을 오르내리며 쉽게 돈을 벌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화마가 모든 것을 쓸어간 이곳의 가을은 황량하기만 하다. 앞으로 30년은 족히 기다려야 이곳에서 송이를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간첩출몰 등으로 혼란스런 가운데 이곳의 가을은 산촌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며 그렇게 쓸쓸히 찾아왔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자 숯덩이 잿덩이가 된 산에서 토해내는 검은 흙탕물이 계곡을 타고 흐른다. 찌는 듯한 더위가 계속되고 나무그늘 하나 없는 고성의 불탄 숲에는 새도 곤충도 아무 것도 없다. 간혹 떠돌던 구름이 만든 그늘이 유일한 쉴 곳이다. 홍수조절 기능을 갖고 있던 입목이 모두 소실되어 산사태를 우려하는 주민들의 걱정이 태산이다. 당국에서는 피해목을 정리하고 산지 사방작업으로 연이은 피해를 막으려 한간힘을 쓴다. 그러나 점성이 약한 마사토가 많아 태풍이 비켜가기를 하늘에 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