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은퇴 (3)
빛으로 그린 세상
이곳은 강원도 민둥산 정상입니다. 온 산자락에 은빛 물결로 출렁이던 억새들이 해가 저물어가면서 황금빛으로 물들어갑니다. 지나온 길은 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까요? 돌아보면, 아름다운 그 길에서 향기도 맡아보고 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마음껏 누리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더 빨리 오르려는 욕심으로 앞만 보고 달렸던 그 걸음들은 비단 이곳만은 아니었겠지요. 어쩌면 제가 그동안 살아온 인생 걸음걸음도 그와 같았다고 생각됩니다. 이제는 내려 가야할 시간입니다. 어둠이 밀려오면서 억새가 바람에 서걱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이제서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유로운 내 자신을 만납니다. 서툴렀지만 열심히 달려온 저에게 억새들이 온몸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은퇴 후 꿈꾸는 삶은 좀 더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고향집을 찾아 일을 벌일 때 이 느낌에 한발 다가서는 것 같습니다. 주말에 고향집으로 달려가 아담한 서재를 위해 작은 사랑방 공사를 계속 했습니다. 이틀 동안 황토몰탈과 핸디코트로 미장을 하고 전통 문과 통창 작업을 했습니다. 바쁜 시간을 내서 순창에서 농촌필사기 교육을 함께 받은 형님 한분이 도와주러 오셨고 친구이자 대부인 대학동창도 함께 땀을 흘렸습니다. 이틀간의 작업을 마친 후의 제 얼굴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고된 노동으로 몸은 지쳤지만 눈이 맑아졌고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한 표정입니다. 상량문을 대신해 미장을 마친 황토벽에 난을 처 오늘의 이 기쁨을 기념했습니다. ^^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는다. 넓적한 플라타너스 잎들이 발아래에서 바스락거린다. 젊은 날 낙엽을 밟을 때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낭만을 즐기곤 했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낙엽 밟는 소리에 가슴이 시려 온다. 낙엽들이 서울시민보다 많을 것 같은 양재 시민의 숲을 걷는 중이다. “부아앙∼빰바∼.” 경부고속도로와 인접한 산책로 벤치에서 트럼펫 소리가 들려온다. 자동차 소음과 섞여 들려오는 금관악기 소리에 까마귀가 깍깍 화음을 넣는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청바지를 입은 중년 신사가 악보를 보며 트럼펫 연습에 한창이다. 수북이 쌓인 낙엽 앞에서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작년 말에 정년퇴직했다는 최덕하(64) 씨다. 30여 년간 교회 차량을 운행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