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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수고를 담고… 쇠파이프 품에서 쉬는 장갑

빛으로 그린 세상 2020. 6. 15. 12:29

‘탕탕탕’ ‘지잉∼칙’

용접 불꽃이 사방으로 춤을 춘다. 코끼리만 한 프레스 기계가 굵은 쇠판을 무 자르듯 자른다. 녹슨 쇳가루들이 바람에 날리고 골목마다 쇠 타는 냄새가 진동한다. 옆 골목에선 젊은 예술가들이 쇠붙이를 이어붙이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철공소와 예술 공간이 공존하는 문래동의 모습이다. 지게차들이 분주히 물건을 싣고 내리는 가운데 판매를 위해 쌓은 쇠파이프가 눈길을 끈다. 큰 파이프 안에 작은 네모, 세모 파이프들이 빼곡히 들어 있는 모습이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고 있다. 가만히 보니 줄자, 래커, 계산기, 볼펜 등 온갖 작업도구가 구멍 안에 촘촘히 들어앉았다. 그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질서와 패턴이 마치 작은 우주를 보는 것 같다.

“미적 감각이 탁월하시네요.”

파이프를 정리하고 있던 정관중(75) 씨에게 인사를 건네자 사다리에서 내려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마디 툭 던진다. “미적 감각, 그런 거 몰라. 하나둘 쌓다 보니 저리됐지 뭐…….”

손님은 없고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만 있다면서 깊은 한숨을 내쉰다.

“오늘 개시도 못 했어. 40년 넘게 쇳물 먹었지만 이렇게 어려운 건 첨이야.”

정 씨의 말을 듣고 보니 옆집 가게와 그 옆집도 문이 닫혀 있다.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은데 ‘힘내세요!’라는 상투적 말밖에 나오질 않는다.

“장사 안된다고 찌푸리고 있으면 뭐 나아지나, 그저 웃어야지…….”

호탕하게 웃는 정 씨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파이프에 끼워놓고 가게로 들어간다. 철공소에서 잔뼈가 굵었을 그의 뒷모습이 쇠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정 씨의 손을 대신하던 기름때 묻은 장갑이 둥그런 파이프 위에 자리 잡았다. 동그라미, 네모, 세모, 각종 쇠파이프가 일제히 하루 종일 수고한 장갑을 토닥이는 것 같다. 노동과 예술이 공존하는 삶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온갖 철의 소리가 격려의 박수처럼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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