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가을 숲 속의 보물찾기 본문

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가을 숲 속의 보물찾기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18. 09:49

- 경기 하남 밤줍기 체험

 

환하게 웃는 식구들마다 묵직한 밤자루가 손에 들려 있습니다. 산속에서 보물을 찾듯 알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특별한 덤입니다. 저절로 벌어져서 저절로 떨어지는 알밤을 주우며 가을의 의미도 되새겨 봅니다. 지금 이곳에는 가족과 함께 나누는 풍성한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 갑니다.

#“밤봤다!”
고개를 잔뜩 숙이고 무언가를 찾느라 열심입니다. 낙엽을 헤치고 풀잎 사이를 뒤지다가 문득 땅에 떨어져 있는 싱싱한 알밤이 눈에 들어옵니다. “밤봤다!” 자기도 모르게 환호가 터집니다. 윤기 나는 고동색 알밤이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밤을 주워 자루에 담으면 또 다른 밤이 눈에 띱니다. 나무 아래에도 낙엽 속에도 벌어진 밤송이 안에도 알밤이 반짝거립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산 속에서 보물을 찾듯 사방에 떨어져있는 알밤을 줍느라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경기 하남의 할아버지 밤동산입니다.

밤동산에는 입구부터 줄지어선 나무마다 밤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유례없이 잦은 비로 유난스러웠던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고 있는 밤나무가 기특하고 고맙습니다. 햇볕은 따사로이 내리쪼이고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어디선가 “툭, 투둑” 알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체험을 위해 만들어놓은 논에도 누렇게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붉은 수수가 바람에 흔들거립니다. 장독대 옆에 핀 코스모스와 길섶에 무리지어 피어있는 벌개미취들이 가을의 정취를 더해줍니다. 도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서 바야흐로 결실의 계절을 느낍니다.

#누가 누가 많이 줍나
산자락에는 밤나무마다 가족들이 밤을 줍느라 분주합니다. 이곳저곳에서 “밤이다!”하는 환호성이 울려 퍼집니다. 밤나무를 여러 그루 차지하고 있는 대가족도 보입니다. 한임순(69) 할머니네는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자, 손녀들까지 모두 모여 열심히 밤을 줍습니다. “추석 때 언니가 시골에서 늘 밤을 가지고 오는데, 올해는 추석이 너무 일러서 밤을 안가지고 왔어요. 식구들이 다 밤을 좋아해서 아예 직접 밤을 주우러 이곳으로 왔지요.” 둘째 딸 김용주씨가 그득한 밤자루를 보여주며 활짝 웃습니다. 아이들은 경쟁이 붙어서 서로 밤을 많이 주우려고 난리법석입니다. 그런 대가족의 모습이 이 계절만큼이나 넉넉해보입니다.

인천에서 새벽에 왔다는 세원이네 가족도 만났습니다. 네 살 세원이는 고사리 손으로 땅에 떨어진 알밤을 줍고 아빠는 밤송이를 두 발로 까서 쌍둥이 알밤을 꺼냅니다. “어릴 적에는 밤을 많이 주웠지요.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서 밤나무 숲으로 가면 이슬 때문에 신발이 축축해졌어요. 그 이슬을 헤치면서 손으로 더듬어서 간밤에 떨어진 알밤을 줍는 게 이맘때쯤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지요.” 고향이 대구라는 세원이 아빠는 밤을 줍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습니다. 구덩이를 파서 밤을 저장해놓고 장날이면 밤을 팔러 다니던 할아버지며, 밤이 먹고 싶어도 실컷 먹지 못했던 추억들이 고구마 덩굴 캐듯 주렁주렁 달려 나옵니다. 그래서인지 늘 가을이면 가족과 함께 밤을 주우러 다닙니다. 그렇게 아빠는 어린 딸에게도 가을의 추억을 선물합니다. 

#저절로 벌어지고 저절로 떨어지는
산을 오를수록 밤송이들이 더욱 탐스럽습니다. 벌어진 밤송이마다 들어 찬 토실한 밤들이  한줄기 바람에도 투두둑 떨어집니다. 오뉴월에 아찔한 향기가 진동하는 밤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여름 내내 뾰족한 가시를 키워가며 열매를 꼭꼭 품었던 밤나무들입니다. 긴 여름 동안 햇살도 받지 못한 채 끊임없이 내리는 비도 견뎌냈겠지요.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고 한낮의 햇살이 따갑던 어느 날, 밤송이가 저절로 벌어지고 잘 익은 햇밤이 땅에 떨어집니다. 억지로 밤송이를 털어서 알밤을 꺼내면 뾰족한 가시로 공격하며 쉽게 열매를 내주지 않던 밤나무가 이제는 순순히 열매를 내어 줍니다.

“이곳에서는 밤나무 가지를 꺾거나 밤송이를 억지로 터는 사람들은 없어요. 판매를 위해서 따로 수확하지는 않으니까, 땅에 떨어진 밤이 많아서 그냥 주우면 되요. 그렇게 땅에 떨어진 알밤을 사람도 먹고 다람쥐도 먹고 청설모도 먹고 더러는 땅에 묻혀 알밤이 밤나무로 다시 태어나기도 하지요.” 힐아버지 밤동산을 운영하는 김영래(65) 대표입니다. 도시의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가치를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할아버지’는 학생들에게 농업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습니다. 퇴직을 하고 밤나무가 있던 선산을 다시 가꾸어서 지금의 밤동산을 만들었습니다. 하남시 객산 자락 5천여 평에는 밤나무뿐만 아니라 사계절 아이들이 농사체험을 할 수 있도록 작물이 심어진 논밭이 있고 닭, 토끼, 강아지 등을 키우는  동물농장도 있습니다.

#가을이 주는 보물
밤나무 숲속을 헤치고 다니며 보물을 찾듯 밤을 열심히 줍던 지호(7)와 규리(5)가 이제는 길가에 핀 복숭아꽃과 분꽃의 씨앗을 손바닥에 모읍니다. 내년 봄에 심을 거라며 엄마에게 씨앗을 건네는 손길이 아주 조심스럽습니다. 지호에게는 또 다른 보물이 생겼습니다. 가능한 한 매주 가까운 곳이라도 아이들에게 자연을 느끼게 해준다는 지호아빠 박정희씨는 숲 속을 뛰어다니는 딸이 귀여운지 번쩍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줍니다. 아빠의 사랑을 볼에 듬뿍 묻힌 채 규리는 다시 촐랑촐랑 뛰어다닙니다. 그 아이들 뒤로 밤나무에서는 투두둑 밤이 떨어지고, 벼이삭이 누렇게 익은 손바닥만 한 논에서는 하릴없는 허수아비가 낮잠을 잡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마다 묵직한 밤자루가 손에 들려 있습니다. “차라리 시장에서 밤을 사는 게 낫겠네.”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한마디 거듭니다. 그래도 빙긋빙긋 웃기만 합니다. 내가 주웠기 때문에 밤 한 톨 한 톨이 더없이 소중하니까요. 가족과 같이 열심히 찾다가 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특별한 덤입니다. 더구나 풍성한 가을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가족과 함께 나누는 추억까지도 자루에 담겨 있으니까요. 입구에 줄지어선 밤나무는 늦게 열리는 품종이라 아직 가시투성이 밤송이들이 달려 있습니다. 가을 햇살과 바람이 더 쌓이면 저절로 벌어져서 잘 익은 햇밤을 떨어뜨려 주겠지요. 무르익는다는 것은 견디어 내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란 걸 문득 깨달을 수 있는 것도 가을이 주는 보물이겠지요. 지금 이곳에선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갑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