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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산책을 하며 사진을 찍을 때 마다, 카메라 화면에 떠있는 “1/125, 1/250” 이 뭔지 항상 의아했었다. 설명서에 셔터 속도라고 명시가 되어 있었지만, 셔터에 한번 “깜빡!” 하면 사진이 찍히는 것이지, 무엇 하러 그 “깜빡!” 거리는 속도까지 조절을 해야 하나 싶었다. 평온한 일요일 아침에 산책길에 오른 나는, 아마도 날씨가 많이 포근해 져서 인지, 많은 사람들이 조깅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호수공원을 유유히 순회하는 모습을 보았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낯선 사람들이, 오늘 따라 자전거 타는 아저씨의 종아리 근육이 돋보였고, 한 발 한발 내딛으실 때 마다 씰룩씰룩 거리는 조깅하는 할아버지의 “노쇠하신 분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팔 근육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변태적인 동기가 아..
2000년 봄 또다시 화마에 휩싸였던 산등성이 가운데는 맨살을 드러낸 채 흙먼지를 날려보내고 있었다. 삼포리 일대는 불난 자리에 거대한 골프장이 들어섰다. 두차례의 화마로 주민들의 큰 저항없이 무혈입성했다고 한다. 죽왕면 인정리와 구성리 국유림에 마련된 영구조사지는 인간의 손을 대지 않고 자연이 스스로 회복하기를 기다리는 곳이다. 이곳에는 굴참나무, 신갈나무, 물오리나무들이 서로 숲의 주인이 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따라서 몸을 숨길 만한 공간이 마련돼서인지 계곡 아래 개울가의 젖은 모래바닥에 고라니와 멧돼지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들이 눈에 띄어 너무도 반가웠다. 개울에 발을 담그니 송사리떼가 발끝에 모여들었다. 이선녀 아주머니가 벌써 7순을 맞으셨다. 집에서 키우는 소가 40마리로 늘어나 ..
2003년 4월. 봄은 어김없이 고성땅에도 찾아왔다. 식목일을 하루 앞둔 4일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야산을 찾았다. 민통선과 가까운 이곳은 지난 2000년 화공작전으로 일어난 불이 이 일대 야산으로 바람을 타고 옮겨 붙어 검은 숯덩이로 변한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도 불탄 나무 등걸 사이로 진달래와 노란제비꽃이 활짝 피었고 불탄 나무들을 제거한 야산에는 희망의 나무심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식물들의 생존경쟁은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먹이를 찾아 온 제법 큰 새들이 간간히 쉬어간다. 오래지않아 포유류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자연은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다독이며 희망의 입김을 불어 넣는다 오랜동안 시체처럼 서있던 검은 나무들은 빈자리를 만들며 하나 둘 흙으로 돌아간다
2000년 4월 온 나라가 총선의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 강원도 동해안 일대에 거대한 산불이 다시 발생했다. 고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고성 산불현장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이곳에 나비들이 날아들기 시작하고 미생물들과 미미한 곤충들이 가날픈 몸짓으로 숲을 가꾸고 있었다.
산불이 발생한 지 2년이 되었다. 국도변을 중심으로 보기 흉한 검은 숯덩이들은 대부분 베어져 트럭에 실려갔다. 인공 조림된 어린 나무들은 황량한 땅위에서 살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해가 바뀌어도 아직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곳이 있다. 당시 산불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