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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슬픔 삼키며 불고 또 불고… 영혼 위로하는 색소폰

빛으로 그린 세상 2020. 9. 19. 08:17

붉은 저녁노을이 호수에 스며든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다시 마스크를 쓰고 호숫가를 걷고 있다.

멋진 모자를 쓴 노신사가 검은색 가방에서 황금색이 번쩍이는 악기를 꺼내 조립하더니 석양을 배경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굵직한 중저음의 색소폰 소리가 잔잔한 물결 위로 퍼져 나가며 무심하게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이 악기가 저한테 살아갈 힘을 줘요.” 연주가 끝나고 이근성(63) 씨가 악기를 소중하게 감싸 안는다.

중학교 때 아버지의 카세트에서 나오는 색소폰 소리를 처음 듣고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언젠가는 저 악기를 연주하고 싶다는 열망을 키웠지만 먹고살기 바쁘다 보니 잊고 지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건축업을 하던 그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시름을 잊기 위해 찾은 술집에서

어릴 적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처럼 그 소리에 끌려 독학으로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 이후 사업을 재개하고 기쁠 때나 힘들 때나 그는 색소폰과 한 몸이 됐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고 웬만한 어려움도 견딜 수 있었다. “색소폰을 불고 있으면 영혼이 위로받는 것 같아요.”

2005년 사소한 의료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 작은 수술이었는데 하반신 마비가 오더니

결국 다시는 어머니를 뵙지 못하게 됐다. 상심이 너무 커 며칠 동안 밥을 입에서 넘기지도 못하고 지내다가

색소폰을 꺼내 들었다. 어머니를 그리며 눈물 반 한숨 반으로 불고 또 불었다. 연주를 마치니 식욕이 돌아오고

마음도 안정이 됐다. 색소폰을 얘기하는 그의 눈이 반짝인다. 사랑하는 연인의 눈빛이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일하고 그 어느 때보다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서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지만 스스로 기쁨 주는 일을 만들어 가면 그래도 살 만하리라.

연주를 한 곡 청했다. 심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연주한 곡은 ‘여러분’.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너의 벗 되리라∼”

굵직한 중저음 소리가 호수에 메아리치며 사람들의 처진 어깨를 토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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