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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에미 /송해월 푸르륵 푸르륵 풀숲에서 풀숲으로 실바람에도 몹시 흔들릴 것 같은 저 조그만 몸뚱어리 종종거리며 바쁘게 옮겨다니더니 가만, 알을 품었구나 저렇게 조그매도 에미로구나, 너 에미로구나 콩알 같은 까만 눈 경계의 빛 날카로워도 온통 착하게만 보여 너 어떡한다니 그 작고 순한 몸으로 세상을 향해 겁없이 맞서는 모성(母性)은 너에게도 참으로 눈물겹고 거룩한 것이었구나 그래, 에미로구나 저렇게 조그매도 에미로구나 에미라면 그래야지 그래 그래야지.
작은 물방울 모여 맑은 시냇물 바위 넘어 흐르듯 날이 밝으면 어디선가 다가와 감도는 향기로움 난초蘭草 잎 닦으며 내일을 바라보며 유리창 퉁기는 우리 가족 정다운 목소리 평생 물리지 않는 밥처럼 난 향기 은은히 미소로 마주 보는 얼굴. 김 후 란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뜨거운 열정으로 - 능소화 / 최경애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연초록 새봄에 말라비틀어진 나무줄기로 오래도록 침묵하는 그 때는, 게으른 줄로만 알았습니다. 분주히 꽃을 피우는 나무 사이로 느릿느릿 잎사귀를 내미는 그 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무성한 녹음만이 한창인 긴긴 여름에 이토록 뜨거운 열정으로 피어날 줄은. 오랜 침묵과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열정을 키워가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것을…….
배롱나무꽃/김선규 무엇을 위한 간절한 염원일까. 석 달하고도 열흘 지는 줄 모르게 쉼 없이 피어나는 꽃. 쏟아지는 장마와 뜨거운 햇살에도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한결같은 마음이여.
배초향 꽃밭에서/최경애 그대가 곁에 머무를 때면 하염없이 바라만 보아도 좋았습니다. 그대가 떠나가도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은 보랏빛 향기가 되었습니다. 찬바람이 불면 스러질 운명이지만 그대 향한 사랑의 향기는 더욱더 짙어만 갑니다.
그리움이 컸던 만큼 내리는 비가 반갑습니다. 들녘 스케치를 마치고 바삐 회사로 돌아오던 길, 금계국 꽃대에 데롱데롱 매달린 물방울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풀잎마다 주렁주렁 꽃보석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움이 컸던 만큼 한방울 한방울 보석처럼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