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자료실/시와 사진의 만남 (40)
빛으로 그린 세상
갈대를 위하여 / 강은교 아마 네가 흔들리는 건 하늘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키 큰 바람이 저 쪽에서 걸어올때 있는 힘 다해 흔들리는 너 연분홍 살껍질을 터뜨린 사랑 하나 주홍빛 손을 내밀고 뛰어오는 구나 흔들리면서 그러나 결코 쓰러지지는 않으면서 흔들리면서 그러나 결코 끝나지는 않으면서 아, 가장 아름다운 수풀을 살 밑, 피 밑으로 들고 오는 너 아마 네가 흔들리는 건 흔들리며 출렁이는 건 지금 마악 사랑이 분홍빛 손을 내밀었기 때문일 것이다.
멈춤 혹은, 맺힘/ 강신애 잎사귀가 수십 캐럿짜리 금강석을 받아들였다 느꼈는가 초록의 무게를 물방울이 그물맥 융단을 몸 속으로 펼쳐놓았다 보았는가 단단한 섬광을 시간이 우리를 감싸안았을 때 노래가 터져나왔다 화살에 적중한 과육처럼
물안개/ 이수명 너를 거기 두고 사람들 속에 사람들의 집과 집 속에 두고 나는 빠져 나온다. 벌집 같이 우리가 짰던 시간의 그물 속에 이제는 잠든 그 촘촘한 집 속에 너를 거기 두고 나는 잊어 버린다. 너를 감추기 위해 나도 모르는 곳에 너를 숨기기 위해 나는 이 곳을 떠나려 간다. 물안개가 되어
감 / 강은교 얽힌 길 풀어, 풀어 돌아왔네 ___ 이 빛 바드시오 ___ 이 빛 바드시오 그대 목소리 어디에선가 들려 ___ 이 빛 바드시오 ___ 이 빛 바드시오 따순 허공에 주홍빛 뺨 문지르는 기쁨의 속가슴 뒤 돌아왔네 얽힌 길 풀어, 풀어.
나는 황소처럼 느리게 갈 것이다 / 신현림 잠시라도 느슨해지고 싶어 푸른 정자처럼 앉아 강물을 굽어본다 가장 풍요한 방식으로 마음을 눕혀 벽이란 벽 문이란 문 다 열고 귀와 눈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 다 열면 바람이 난지 내가 바람인지 모른다 스피드가 다는 아닌데 세상이 얼마나 빨 리 흐르는가 스피드는 여운을 남기지 않는다 여운없는 삶이란 얼마나 메마른가 당신은 빨리, 빨리, 빨리, 외치며 달려도 나는 황소처럼 느리게 걸을 것이다 땅에 입맞춤하며 느리게 모든 것을 음미하며 느리게
당신 생각하는 힘으로/ 신현림 배가 고프면 밥지어 먹고 쓸쓸해지면 달무리에 감싸인 달처럼 당신 팔에 휩사여 깊은 잠을 자리 가슴의 갈대밭에 달아오르는 당신 심장 그 아늑한 노을을 느끼며 함께 있는 것에 새삼 놀라리 가슴 속으로 산비둘기 한 마리 날아오면 밤새도록 눈이 내린 길을 보며 나는 일어나 다시 살리 당신 생각하는 힘으로
함박눈 다음/김혜순 해마다 성탄절 아침이면 어느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새 아기 한 분씩 방문해 오듯이 해마다 겨울날 어느 아침이면 어느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첫눈송이들이 방문해온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눈이불 아래 누워서 강을 묶어놓은 얼음 얼음짱 밑의 물고기들 그 겨울 물고기들의 조용하고 조용할 밀실을 생각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눈사태가 빰을 치고 지나간 산머리 그 아래 숨죽인 도토리 눈뜨고 잠든 뱀 네 활개를 쫙 벌린 개구리 눈뜨고 기다리는 수많은 눈동자, 눈동자 그 조용하고 조용할 흰눈이불 속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아침 눈 이불 속에서 아이구 저 아기를 어쩌나 아장거리며 내려노는 내 어린 시절 옹알이하며 다가오는 아기를 맞이한다 눈뜨고 꾸는 꿈속에서처럼 내 품으로 다가오는가 팔 벌리면 어느새사쁜..
배달의 기수/ 김혜순 서울에 살면 태양도 배달온다 구름도 배달온다 바람도 배달온다 나는 오늘 창문을 열고 퀵 서비스로 도착한 눈보라를 풀어본다 정오엔 삼척에 사시는 엄마가 보낸 깊은 바다가 도착했다 여기가 깊은 바다 속 어느 집 안방이냐 심해에서 온 게들이 두 눈을 껌벅인다 잠결에도 드리는 집 앞에 오토바이 멈추는 소리 누군가 겨울밤을 집집마다 부려놓고 가는 소리 아무도 받아주지 앉자 택배 꾸러미를 박차고 나온 초승달이 미끄덩거리며 비상계단을 오르는 소리 식반을 머리에 인 아저씨가 빈 그릇 내 놓으라 주먹으로 대문을 꽝꽝 두드리는 소리
눈 길 / 황 인 숙 발바닥을 튕겨내듯 가볍게 잡아당긴다 귓속에서 속삭이는 아니, 발바닥이 직접 듣는 바삭 소리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버리는 하양 끝없이 점멸하는 1만 가지 색채의 까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