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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어머니가 식탁에서 무언가에 열심이시다. 다가가 보니 당신이 좋아하는 꽃그림에 정성스레 색칠하고 계신다. 어머니의 손길을 받은 꽃들이 공책위에서 화사하게 피어난다. 밭일을 하시며 틈틈히 꽃가꾸기를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지난겨울 대퇴골을 크게 다쳐 걷기조차 힘에 부쳐하셨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한동안 힘드셨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신 어머니가 이제는 직접 심고 가꾸는 대신 그림으로 꽃을 키우신다. 색감이 곱고 아름답다. 그림을 배워 본적이 없지만 76세에 화가가 된 미국의 모지스 할머니 애기를 들려드리며 어머니도 화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아이고, 이 나이에 뭘 하겠니.” 수줍게 웃으시지만 싫지는 않으신 것 같다. 어머니는 오늘도 호미대신 색연필로 꽃을 가꾸고 계신다. 어머니가 호미대..
한바탕 출근 전쟁을 치른 후 차분해진 도심에 풍경 하나가 말을 걸어온다. 대형서점 앞 벤치에 한 노신사가 동상 옆에 같은 모습으로 앉아 책을 보고 있다. 그 모습에 반해 가던 길을 멈추고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아 기웃거려보니 노신사가 형광펜으로 책에 밑줄까지 그어가며 열공 중이다. “책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워요.” 전직 공무원인 서춘근(69) 씨는 나이제한이 없는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며 수줍게 웃는다. 서점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면서 짬을 내 책을 보고 있는 중이다. 새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 난다.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서 씨의 모습이 6월의 신록처럼 싱그럽다. 촬영노트 아침, 저녁의 햇살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빛이 품고 있는 색온도가 분위기를 따..
사각사각, 사각.’ 학생들이 왁자지껄 집으로 돌아간 고요한 교실에는 연필 소리만 가득하다. 학생 한 명이 교실에 남아 무언가를 적느라 열심이다. How do you go to school? 하우 두 유 고 투 스쿨? I go to school by car. 아이 고 투 스쿨 바이 카. 중3 김현희(62) 학생이 영어 단어에 우리말을 달며 숙제를 하고 있다. 입학 당시만 해도 까마득했는데 조금씩 말문이 트이고 외계어 같은 영어 글씨가 친근해지기 시작했다. 애써 외면하던 동네 영어 간판들이 슬슬 말을 걸어왔다. “마구 가슴이 뛰는 기라예.” 자원봉사를 갔다가 우연히 모집공고를 보았던 때를 떠올린다.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중학교 과정을 모집하는 공고였다. 오래전 잊어버렸던 꿈이 꿈틀대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