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눈 길 / 황 인 숙 발바닥을 튕겨내듯 가볍게 잡아당긴다 귓속에서 속삭이는 아니, 발바닥이 직접 듣는 바삭 소리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버리는 하양 끝없이 점멸하는 1만 가지 색채의 까망
봄의 꿈 / 황인숙 봄비가 보습처럼 완고하고 무표정한 하늘을 바스라트렸다 어디론가 가 보고 싶지만 그곳이 내게로 온 것도 같다 사방간 데로 꿈틀거리는 아지랑이 속을 사방간 데로 걸으리 땅에 갓 뿌리를 묻은 묘목들도 무덤들도 푸르러지리.
봄비가 여자를 위로하네/ 정은숙 언덕에 여자가 서있을때 바람부는 쪽으로 덧없는 하루가 또 흘러가네. 세월이 흘러가면 존재는 사라져, 그를 막아선 여자도 사라져 눈물을 흘릴 주체도 사라지네. 낮게 드리운 여자의 하늘도 숨죽여 흔들리는 풀들의 세계도 이제는 아무도 여자를 받아주지 않네. 그때는 여자여 내가 안아주리라, 만나러 가리라. 발목을 적시는 사랑으로 네게로 가리라. 너무 오래 우리는 한 가족임을 잊고 모래바람 속에서 동질감 잃고 살았네. 그 삶이 좋았을 리 있으랴. 이제 봄비도 여자를 위해 내리는데...
나무와 아이들 / 김 후 란 하늘 넓은 세상이 우리 앞에 있어요 믿음직한 나무가 우리 곁에 있어요 나무와 우리 하나가 되어 신나게 뛰어 놀고 배우고 익히고 우리는 학교숲 꿈나무예요 담이 없는 우리 학교 환한 운동장 자연이 숨쉬는 학교숲에서 쑥쑥 자라나 큰 일꾼 될래요 엄마 아빠 선생님 즐겁게 뛰는 우리들 정다운 학교숲을 모두모두 좋아해요
격포에서 / 이문재 더 나아갈 수 없는 어스름과 다시는 돌아가기 어려운 아침 문자 메세지를 보내려다 만다 채석장 앞에서 기우뚱 미끌어진다 얼마 전부터 낯설어진 생애의 단층이 한쪽으로 기운다 목에 걸려 있는 휴대폰을 들어 파도의 이마를 향해 던진다 늦가을 격포는 제대로 어두워져 있다 땅 끝 여기는 해발 제로 선(線)에서 점으로 내가 먼저 와 있다 천년 저쪽에서 달려온 별빛들이 다시 천년 저쪽으로 달려나간다 격포에서 격포로 망명한다 나의 근황은 이제 나만의 근황이다 내가 먼저 와 있는 것이다 ('격포에서' 일부, 시집 '제국호텔'.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