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저무는 서해에서/정끝별 서쪽으로 난 세상 비탈에 허물어지는 해의 살빛으로 세운 계단 백만 갈래의 길을 품은 채 백만 골의 이랑을 물들이고 어두워지는 뭍의 풍경을 등에 지고 걷다보면 일렁이는 불길 층층이 젖은 길들이 밟히고 화근의 해가 지면 바다의 주름을 잡아당기자 뭍의 기다림들은 아코디언 소리를 내며 퍼진다 연하디연한 기억 안쪽이 아프게 접힌다 미끈, 발밑이 습곡처럼 주저앉는다 또 내일이면 바다의 계단이 하나 늘어나고 검게 탄 뭍의 길이 하나 떠오를 게다 찌걱이며 빠져나가는 길의 무덤에서 쓸쓸한 서해에서 저 붉은 소멸의 사원에서 소년들은 타오르는 시간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흥건하게 비린 길들을 캐고 있다
연초(煙草)무는 시간/이진명 지금 여기 연초 무는 시간 한여름 오지의 촌로 대궐문처럼 열어 논 대문 그 안켠 짙디짙은 그늘 속에서 연초를 물고 오직 듣는다 지워진 귀로 지워진 귀로 끓어오르는 햇빛의 대답 짙디짙은 그늘을 짙디짙은 그늘의 대답 끓어오르는 햇빛을 그러나 같이 듣는다 한손이 올려짚은 깡깡한 지팡이와 두발 살금 빼 디딘 검정고무신과 대문 밖 고추밭 속 고추의 새빨간 눈 몇은 뮛도 모른 채 촌로의 손가락새로 피어오르는 연초연기를 맵도록 맵도록 잡고 있다 잡을 수 없는 그 한 생의 연기를
꿈길/이진명 어머니, 무량한 빛 쬐며 꿈길을 오시네 겹겹 희디흰 잔꽃송이 발을 넘어 광활한 꿈길을 생전처럼, 어머니 무겁고 아팠을 남색 보따리 높게 머리에 이고 얼굴 다 태우고 가시고도 무엇을 이고 오시나 뜨겁게 이고 오시나 감자나 떡, 옥수수와 메주콩 같은 양식거리를 무량한 빛 쬐며 옛 어머니, 가신 어머니 언제 도착하시려나 그러나 가벼이 두 손은 가벼이 놓으셨네
노을을 적다/천양희 노을이 저혼자 붉다 바다는 놀빛을 당겨 물위에 적는다 좋은 시 한편 공양받은 하늘 한쪽이 붉다 하늘도 때로 취할 때가 있으니 하루에도 몇번 길을 내는 바다를 누가 바라만 보라고 바다라 했나 보라 넘치지 않는 건 저것 뿐이다 하늘을 안고 있는 건 저것뿐이다 저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