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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가을에 쓰는 편지

진목토우 2017.07.07 15:21

 

- 강원도 정선군 민둥산

그대, 안녕하신지요?
이곳은 온 산자락에 억새들의 은빛 물결이 출렁입니다.
부스스 부풀어진 억새들이 저무는 햇살을 잔뜩 머금고,
바람 따라 허연 머리채를 이리저리 휘날리는 풍경 너머로 하늘이 성큼 다가섭니다.
이곳 민둥산에서, 가을 하늘을 마주 보고 앉아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시나요? 일상에 묻혀서 분주히 앞만 바라보느라 제대로 보지 못하는 하늘 말입니다. 산동네에 있는 어느 성당을 찾아갈 때였습니다. 좁다란 골목을 지나 꺾어진 길을 오르느라 고개를 들었는데, 낡은 집들 사이로 조각난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렀습니다. 문득 얼마 만에 보는 하늘인가 하는 생각에 울컥했습니다. 왜 그토록 앞만 보고 달렸는지, 그 조각난 하늘을 바라보며 거울 속에 비친 낯선 내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나는 지금 일렁이는 억새 물결과 함께 가을 하늘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민둥산을 오르는 내내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고 왔음을 깨닫습니다. 산은 부드럽지만 산 정상이 해발 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인데다 가파른 흙길이 이어져 만만치가 않았지요. 억새에 매달린 작은 꽃차례도, 동그랗게 말린 꽃들이 술처럼 퍼지는 것도 제대로 보지 않고, 바람에 서걱거리는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정상에만 오르면 장관이 펼쳐질 것을 기대하면서 오로지 땅만 보고 오르기만 했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낍니다.

해가 저물어가면서 하늘은 더욱 그윽해집니다. 내가 올라왔고 되돌아가야할 그 길도 억새들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갑니다. 지나온 길은 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까요? 돌아보면, 아름다운 그 길을 향기도 맡아보고 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마음껏 누릴 것을……. 올라야한다는 의무감으로 앞만 보고 달렸던 그 걸음들은 비단 민둥산 산행만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살아온 인생 걸음걸음도 아이들을 키우던 나날들도 진정 그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한창 나의 꿈을 펴고 싶었던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옴짝달싹 못하던 시절, 해저물녘 겨우 잠든 두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 앞에서 절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잘 키워야한다는 부담감을 가득 안고 아이들을 바라보고, 사회적으로 무언가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내가 먼저 세상에 등을 돌렸던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 시절이 엄마라는 넉넉한 품으로 아이들을 마음껏 품어주고 한편으로는 세상을 향한 날갯짓을 준비하는 시간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아이들이 훌쩍 커버린 지금에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대, 나는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습니다. 멍하니 하늘을 보고 앉아 있으려니 하늘은 짧은 시간에 시시각각으로 다른 표정을 보여줍니다. 이 시간만큼은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시간입니다. 또한 낮과 밤이 공존하고, 밝음과 어둠이 함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낮 동안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영상과 향기가 한꺼번에 응축되는 듯,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도 시야가 또렷해지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향기가 순식간에 터져 나오는 듯합니다. 이래야하고 저래야한다는 당위나 책임으로 허둥대던 세월을 내려놓고 나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유로운 내 자신을 만납니다.

이제는 내려 가야할 시간입니다. 어둠이 밀려오면서 억새가 바람에 서걱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바람이 억새숲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 억새들은 “쓰쓰쓰~” 소리를 냅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울리는 소리입니다. 화전을 일구느라 불을 지른 척박한 땅, 그 곳에서 돋아난 억새들이 가장 깊은 내면에서 만들어내는 영혼의 노래일까요. 가을은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계절이라고 억새들이 속삭입니다. “쓰쓰쓰~”

그대, 가을이 깊어갑니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각박할수록 게으르고 느슨하게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 건 어떨까요. 앞만 보고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볼 당신이 그 파아란 하늘에서 오래 잊고 지냈던 자신을 만나길 바랍니다. 가을 밤,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며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당신이길 바랍니다. 분주히 앞만 보고 살아갔던 어제의 나와 정신없이 살아갈 내일의 나에게 이 가을 편지를 띄웁니다. 
 

 

찾아가는 길
산자락을 가득 뒤덮는 민둥산의 억새밭에서 깊어가는 가을의 은은한 정취를 느끼려면, 영동고속도로 진부나들목으로 나와 59번 국도를 타고 정선을 지나 남면까지 간다. 증산초등학교 앞에서 좌회전해 2Km 정도 달리면 민둥산 입구의 이정표가 나온다.


글. 최경애(수필가)  사진. 김선규(생명다큐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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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 프로필사진 진목토우 2017.07.07 15:21 신고
    무진 최경애 작가님-

    글을 통해 작가님을 만납니다.
    댓글로 마음을 전하지만 준비된 마음입니다.

    울림이 있는 글에 많이많이 고맙습니다.

    '가을에 쓰는 편지'
    탱자빛 전율입니다.

    작가님!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는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이 실현되었다고
    감히 말쓸 드려봅니다.

    저도 어느 새벽 묵상 중에
    내 자신이 지상에 와서 가장 위대한 업적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일이구나.' 였습니다.
    생명을 품는 일만큼 고귀한 일이 또 있겠는지요?

    그리고
    자신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삶을 사랑하고자 의식하는 마음 씀씀이에
    오래오래 감동하렵니다. (2008/10/21 20:21) x





    최경애 무진시인님, 감사합니다.
    써주신 댓글을 읽고 마음이 뭉클해져서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지요.
    한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진시인님 따뜻한 마음 그대로,
    감사하게 잘 받겠습니다.
    서툰 글이지만
    무진 시인님이 달아주신 댓글에 제가 더 감동입니다.

    무진 시인님은 참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시군요.
    외로운 방에 비친 따뜻한 햇살 한줄기에
    제 몸도 마음도 녹아듭니다. (2008/10/25 16:36) x





    무진 애써 가을비를 맞으며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나뭇잎 한 장의 무게만으로
    그렇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참으로 교만했던 날들
    제 육신으로 모든게 가능하리라

    그냥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 말게 해 달라고
    그냥
    제 열망들을 거둬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왔습니다.

    (준철이네 가족을 위해서도 촛불 봉헌 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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