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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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덕수궁 돌담길에서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7. 15:26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길‘ 중에서)

 

단풍이 곱게 물든 덕수궁 돌담을 걷다가 멀리서 어렴풋이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순간 반가움과 당황스러움이 교차하면서 가슴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을 줄 알았는데‚ 도저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추억 속에서 늘 청년인 그는 이제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중년이 되어있었다. 그도 나를 보았을까. 그냥 모른 척 지나갈까. 아니면 커피 한 잔을 나누며 내 남편과 그의 아내에 대한 안부를 서로 물어야할까.

엉뚱한 사람을 두고 이렇게 나 혼자 착각에 빠진 건‚ 노란 은행잎과 주황색 단풍이 낮은 천정처럼 드리워진 돌담길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일 오후‚ 뭉텅 시간이 남아서 덕수궁 돌담길로 향할 때만 해도 마음이 설레었다. 콘크리트 빌딩이 숲을 이룬 도심에서도 나뭇잎들이 곱게 물들고 거리에는 울긋불긋한 낙엽이 뒹굴었다. 굳이 멀리 떠나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든지 고개를 들면 절정으로 타들어가는 단풍에 가슴이 시렸다. 단풍과 돌담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만으로는 왠지 아쉬웠다. 그래서 마음 한편이 아련해지는 추억 한 자락을 붙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빈약한 내 추억의 저장고에는 아무리 뒤져봐야 연인과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걸은 기억일랑 없다. 아마도 헤어진다는 속설 때문이었는지 창경궁만 한 번 가봤던가.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랑 숙제한다고 덕수궁에 왔던 적은 있다. 그 때 외국인 한 명이 다가와서 길을 물었는데 모두 도망가고‚ 친구 한 명이 손짓 발짓하면서 가리켜주었었다. 유난히 웃음소리가 커서 주위를 모두 웃음바다로 만들던 내 친구 성희‚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 본지 오래된 그 친구의 폭발하는 웃음소리가 지금 귀에 선하다.

거리에는 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람‚ 휴대폰으로 연신 서로를 찍어주는 젊은 연인들‚ 그리고 가끔씩 외국인들이 보이지만 내게는 서넛이 함께 다니는 중년 부인들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눈에는 풍경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무언가 그윽함이 배어있다. 덕수궁 돌담길에 얽힌 저마다의 추억에서 우러나오는 향기 때문일까. 한껏 멋을 낸 그들이 굴러다니는 낙엽에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아줌마가 아니라 어느새 여고생들의 모습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의 휴대폰이 울렸다. “학교 잘 갔다 왔니? 그래‚ 간식 먹고 피아노 학원 갔다 와.”하는 통화 내용을 얼핏 들으며‚ 나는 다시 아줌마라는 나의 현실로 돌아왔다. 어설펐던 옛 사랑의 희미한 기억도 여고시절의 웃음소리도 모두 어디로 흩어져버린 것일까. 알콩달콩한 유년의 기억도 별로 없고‚ 학창시절의 푸르던 꿈도 빛이 바래고‚ 옛 사랑의 추억조차 변변찮은 채 홀로 걷는 돌담길에 허전한 바람이 불어온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윤동주의 시가 떠오른다.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던 나날들과, 이루지 못했다는 회한의 세월 속에서 결국 친구와의 우정도 사랑의 추억도 흑백 사진처럼 빛이 바래진 건 아닌지‚ 존재로서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주변의 인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동안 내 안의 자유로운 나 역시 그렇게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덕수궁 안에도 단풍이 한창이다. 아름드리 은행나무 아래에는 은행잎처럼 노란 체육복을 입은 어린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정체성을 고민했던 윤동주 시인이 담 저쪽에 진정한 자신이 남아있다고 했다면 내가 본 덕수궁 담 안쪽에는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존재 그대로 피어나는 아이들‚ 경이로운 눈으로 세상을 탐구하면서 쾌활하고 자유로운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잃어버리고 그래서 찾아 헤매는 또 다른 내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찾아 가는 길
연인과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은 도심 한가운데 고궁과 공연장과 미술관이 있는 문화의 거리이다. 또한 서구열강의 패권다툼이 벌어지고 기독교를 통한 서구문명이 들어오기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돌담과 단풍이 어우러져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덕수궁으로 가려면 지하철 1‚2호선 시청역에서 하차하면 된다. 문의 02-771-99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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