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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공원 돌계단을 오르다 발밑에서 반짝이는 노란 민들레. 보랏빛 제비꽃도 그 옆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점심을 마치고 산책하던 직장인들, 혹여 밟을까 발걸음을 주춤하다 이내 미소 짓는다. 그 어느 곳이든 한 줌의 흙을 움켜쥐고 당당하게 피어나 온몸으로 봄을 노래하는 들꽃들. 척박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었기에 모진 겨울을 견딜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시름하며 회색 겨울이 머물러 있던 우리 마음속에도 희망의 봄이 오고 있다. ■ 촬영노트 모든 생명체는 아무리 열악한 상황에서도 주어진 삶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각자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 길을 가다 콘크리트 바닥의 작은 틈새로부터 빛을 찾아 나오는 노란 민들레를 보면 마음이 환해진다. 길에서 마주하는 들꽃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 보자..
겨울의 그림자가 아직 가시지 않은 깊은 산속. 찬바람에 여린 솜털을 떨면서도 봄소식을 전해주려 언 땅 비집고 나온 가냘픈 노루귀.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다만 자기 자신으로 피어나서 최선을 다해 머물다 가는 아름다운 삶. 이런 노루귀를 닮은 민초들이 이 땅의 곳곳에서 말없이 피고 지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봄봄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노루귀라는 정다운 이름은 꽃이 지고 새로 나온 잎 모양이 노루의 귀와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
까치 한 마리가 긴 나무가지를 입에 물고 자동차 사이를 깡충깡충 뛰어 다닙니다. 까치가 집을 지으려면 나뭇가지가 적어도 천 개는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심의 까치에게는 마음에 드는 자리를 정하는 것도, 집 지을 재료를 구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 보입니다. 그래도 새끼를 낳고 기를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심을 부지런히 누비고 다닙니다. 집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요즘, 도심에서 마음껏 자기 집을 짓고 있는 까치가 한편 부럽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기대해 봅니다. 사진,글=김선규 선임기자
재선충으로 고사된 소나무 숲에 조성된 강원 인제군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 하얀 수피에 검은 상처들은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기 위해 스스로 가지를 떨어뜨린 흔적들이다. 마포 임시선별검사소에서 만난 한진희 간호사 백 년의 미소로 행복의 비밀을 전해준 김순택 할머니. 산동네서 연탄배달 봉사하는 인채원 씨와 안경원 씨. 미사가 중단된 명동성당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루치아 자매님 연천 당포성으로 휴가나온 민준이네 가족. 꽃처럼 활짝 웃고 싶다는 취준생 함혜민 씨와 김은영 씨 ‘Mr. 남대문 콩글리시’ 남대문시장 노점상 주재만 씨. 희망의 빛’을 찾아 나선 1年 자작나무 숲을 걷습니다. 하얀 나무들이 아침 햇살에 눈 부십니다. 기지개를 켜고 긴 숨을 들이마시자 청량한 기운이 몸속 가득 스..
잔설이 남은 산 한 모퉁이에 작고 여린 싹들이 얼굴을 내민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자신의 온기로 눈을 녹이고 있다. 산도 개울도 아직은 꽁꽁 얼어 모든 것이 숨죽인 듯하지만, 봄은 우리 곁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다. 여린 싹을 보니 코로나19로 잔뜩 얼어붙은 우리네 가슴속에도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오는 듯하다.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기지개를 켜본다.
삶의 에너지가 바닥날 때면 회사에서 가까운 남대문시장을 찾는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면 어느새 의욕이 조금씩 생겨난다. 특히 시장 한가운데 있는 꽃상가는 늘 그윽한 향기로 나를 반겨준다. 그리고 이곳을 나설 때는 꽃 한 다발과 함께 미소가 배어나곤 했다. 코로나로 꽃시장이 급속하게 얼어붙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단골 꽃집 아주머니가 계시는 남대문 꽃상가를 찾았다. “얘는 어떻게 해요?” “걔들 참 예쁘지요.” 수북이 쌓인 꽃들을 앞에 두고 꽃집 아주머니가 모처럼 찾은 손님과 나누는 대화가 정겹다. 마치 어린아이들 보듯이 사랑스러운 눈빛이다. 30년 넘게 이곳에서 꽃도매를 하는 최명숙(69) 씨다. 코로나로 졸업과 입학 시즌마저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다행히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
돌돌 말려 있던 금계국 꽃봉오리가 찻잔 속에서 활짝 피어난다. 따뜻한 차 한 모금에 추위에 웅크렸던 몸이 살살 녹는 느낌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늘로 날아갈 듯 고개를 쳐든 작고 앙증맞은 솟대들이 작업실에 가득하다. 추위를 피해 전국의 새들이 여기에 다 모인 것만 같다. 웃음을 솟대에 실어 보내는 웃음치료사 송상소(60) 씨의 작업실이다. 방금 제작한 솟대를 보여주는 송 씨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가녀린 나뭇가지에 앉은 새 모양에 화사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5년 전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솟대에 마음이 끌려서 하나둘 만들어 보기 시작했었다. 그렇게 만든 솟대를 이웃에게 선물했더니 하나같이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때부터 솟대를 받는 이에게 항상 웃는 일이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는다. 넓적한 플라타너스 잎들이 발아래에서 바스락거린다. 젊은 날 낙엽을 밟을 때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낭만을 즐기곤 했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낙엽 밟는 소리에 가슴이 시려 온다. 낙엽들이 서울시민보다 많을 것 같은 양재 시민의 숲을 걷는 중이다. “부아앙∼빰바∼.” 경부고속도로와 인접한 산책로 벤치에서 트럼펫 소리가 들려온다. 자동차 소음과 섞여 들려오는 금관악기 소리에 까마귀가 깍깍 화음을 넣는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청바지를 입은 중년 신사가 악보를 보며 트럼펫 연습에 한창이다. 수북이 쌓인 낙엽 앞에서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작년 말에 정년퇴직했다는 최덕하(64) 씨다. 30여 년간 교회 차량을 운행했..
어깨를 맞댄 구릉들이 어머니 품처럼 부드럽다. 장마와 태풍 속에서 알곡을 품어낸 밭들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라는 콧노래가 절로 날 것 같은 드넓은 밭에 아낙 대신 건장한 청년이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다. 콩과 보리로 ‘농촌의 희망’을 꿈꾸는 전북 고창의 청년 농부 한선웅(37) 씨다. 한 손에 낫을 들고 잘 여문 콩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에 생기가 흘러넘친다. 젊다는 것 하나만 믿고 농사일에 뛰어들었다는 한 씨는 대학에서 조경을 전공한 후 개성공단 운영관리를 맡았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오랜 고심 끝에 전주에서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고창으로 3년 전 귀농했다. “마을 사람들 보면 무조건 뛰어가 인사를 했어요.” 덕분에 이장님을 비롯한 마을 분들이..
사각사각, 사각.’ 학생들이 왁자지껄 집으로 돌아간 고요한 교실에는 연필 소리만 가득하다. 학생 한 명이 교실에 남아 무언가를 적느라 열심이다. How do you go to school? 하우 두 유 고 투 스쿨? I go to school by car. 아이 고 투 스쿨 바이 카. 중3 김현희(62) 학생이 영어 단어에 우리말을 달며 숙제를 하고 있다. 입학 당시만 해도 까마득했는데 조금씩 말문이 트이고 외계어 같은 영어 글씨가 친근해지기 시작했다. 애써 외면하던 동네 영어 간판들이 슬슬 말을 걸어왔다. “마구 가슴이 뛰는 기라예.” 자원봉사를 갔다가 우연히 모집공고를 보았던 때를 떠올린다.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중학교 과정을 모집하는 공고였다. 오래전 잊어버렸던 꿈이 꿈틀대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