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할머니 (4)
빛으로 그린 세상
가을을 오랫동안 붙잡고 싶어 단풍잎들을 책속에 끼워두었습니다. 책갈피에서 잘 마른 단풍잎들이 시골집 사랑방 낡은 격자문 위에서 오후 햇살을 받으며 다시 피어납니다. 어릴 적 손자들이 들락거리는 문은 오래 가지 못해 할머니는 창호지를 덧대 마른 풀꽃이나 단풍잎 등을 넣으셨습니다. 궁핍함 속에서도 삶의 여유를 잊지 않으셨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유년의 추억과 함께 피어오릅니다.
‘딸랑 딸랑 딸랑.’ 맑고 시린 풍경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진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독경 소리에 맞춰 연등들이 춤을 춘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도심 속 사찰 길상사를 찾았다. 네 마리의 암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길상7층보탑 주변을 돌며 지친 마음을 다독이다 문득 잊고 지내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만인간 다 편하고 다 평화로워, 화목을 이루면 우리 자식들에게 좋겠죠. 자식들 공만 안 드립니다. 우리나라가 편해야 돼요. 한 몸 한뜻으로 모두 편하게 해주십쇼.” 마치 랩을 하듯이 중얼거리며 기도를 하신 할머니는 앞치마에 고이 가져온 방울토마토 몇 알을 돌탑 위에 올려놓으셨다. “정성이 부족해서 우짠디요, 더 사갖고 올 것인디 이렇게 왔네요.” 햇살이 곱던 그날, 두륜산 만일지암 오층석탑 앞에서 기도를..
“덕구야, 날이 찬데 어디 쏘댕니다 왔어“ “…….” “어쿠야, 몸 젖은 거 봐라, 눈밭을 뒹굴다 왔구나야“ “…….” “고뿔 걸리면 약도 없슨게, 어여 이리와 몸 좀 노게“ “…….” 강원도에서 산이 깊어 가장 봄이 늦게 찾아온다는 정선군 남면 광덕리. 봄이 오는 길목에 겨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산이 높아 앞산과 뒷산을 이어 빨래 줄을 건다는 두메산골 외딴 농가에 정겨운 풍경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가마솥에 불을 지피시던 할머니는 천방지축 눈밭에서 뛰놀던 덕구를 불 가까이 오게 합니다. 할머니의 말에 아무 말 없는 덕구지만 따듯한 시선과 손길에 숨결이 부드러워집니다. 아름다움은 모두 과거에 존재한다고 하지요. 덕구와 할머니의 평화로운 모습에 가난하고 힘들었던 유년의 기억이 미소 지으며 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