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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한 아이가 태어나 세상과 만나는 날, 이날은 한 생명이 온 우주와 만나는 날입니다. 엄마의 손을 처음 잡아 본 아이의 손. 너무 꽉 쥐어 핏기마저 없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불안했을까요.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게게 오로지 믿을 건 엄마밖에 없었겠지요. 엄마의 검지 손가락과 아이의 손바닥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핏줄처럼 서로 흐르고 있을 겁니다. 우리도 이렇게 엄마손을 꽉 쥐어 본 적이 있었겠지요. 어제도 그제도 그냥 의미없이 살아가는 나날속에 우리는 지금 무얼 잡고 살고 있는지요...
시간마저 정지한 듯 고요한 늪 둑을 걸어갈수록 팽팽한 고요 속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집니다. 생명의 수런거림이 들려옵니다. 그것은 억겁의 세월을 살아 숨쉬어온 생명의 땅, 우포의 숨결입니다. 2003/창녕
무심히 지나치면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꽃입니다. 빛바랜 갈색 낙엽 틈에 피어난 파란 꽃이 하도 예뻐서 길을 가다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름을 몰라서 한참을 찾아보니 봄까치꽃(큰개불알풀)이었습니다. 고개를 들면 흐드러진 벚꽃이 분분히 하얀 꽃잎을 날립니다. 진달래, 개나리도 크고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리며 한바탕 꽃 잔치를 벌이는 계절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빛깔과 향기로 수줍게 피어나는 풀꽃들이 있기에 이 봄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2003/일산
'워워-' 겨우내 묵혔던 땅을 갈아엎자 고개를 내밀던 쑥이며 냉이, 질경이 등이 화들짝 놀랍니다. 봄기운에 녹아들고 쟁기질에 한바탕 뒤집혀 으스러지면서 땅은 푸른 생명을 틔울 희망으로 가득 찹니다. 한줌 흙에서도 생명의 기운이 살아 꿈틀대는 어느 봄날. 새삼 내가 '살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2002/홍천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집에 잠깐 들렀습니다. 반갑게 맞아주신 어머니는 최근에 허리수술을 받아 아직 불편하신 몸인데도 호미를 들고 밭두렁으로 나가셨습니다. 들판은 꽃샘추위로 스산했습니다. 허리에 무리가 가니 가만히 계시라는 자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기어코 소쿠리 가득 냉이를 캐서 바리바리 싸주셨습니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나온 냉이처럼 모질게 살아오신 어머니. 당신 몸 부서지는 것 생각 않고 자식들 하나라도 더 먹이시려고……. 아내가 끓여준 냉이 된장국을 먹으며, 냉이보다 더 질긴 어머니의 사랑에 목이 메었습니다. 2004/ 경기 화성
인디언들은 말을 달리다가도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뒤돌아본다고 하지요. 뒤늦게 오는 자기 영혼을 기다리는 것이라 합니다. 자기가 걸어온 눈길을 뒤돌아보는 저 비둘기,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반성하게 합니다. 2009/창경궁
손바닥에 땅콩을 부수어 놓고 손을 쭉 내밀자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곤줄박이가 손바닥에 살며시 내려앉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긴장이 되었습니다. 새도 긴장을 했는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곧이어 가녀린 무게감과 땅콩을 쪼아 먹는 몸놀림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왔습니다. 이렇게 경계와 긴장을 넘어 자연과 사람이 마음을 주고받으며 친구 하는 세상이라면 좋겠습니다. 2005/충남 서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