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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가을을 오랫동안 붙잡고 싶어 단풍잎들을 책속에 끼워두었습니다. 책갈피에서 잘 마른 단풍잎들이 시골집 사랑방 낡은 격자문 위에서 오후 햇살을 받으며 다시 피어납니다. 어릴 적 손자들이 들락거리는 문은 오래 가지 못해 할머니는 창호지를 덧대 마른 풀꽃이나 단풍잎 등을 넣으셨습니다. 궁핍함 속에서도 삶의 여유를 잊지 않으셨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유년의 추억과 함께 피어오릅니다.
코로나를 잘 이겨낸 두분의 어머니를 모시고 동해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들은 오래간만의 여행으로 사돈을 떠나 친구처럼 좋아하십니다. 시리도록 맑고 푸른 하늘이 어머니들의 여행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행이란 단어를 잊고 사셨던 어머니들이 무척 설렜나 봅니다. 머리도 짧게 자르고 염색을 해서 한층 젊어 보이십니다. 장모님은 옷을 새로 사고 파마도 하셨습니다. 내색은 안했지만 오래 전 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셨다고 합니다. "다시는 바다를 못 볼 줄 알았는데..." 아흔이 넘으신 장모님이 바다를 바라보며 감격해 하십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시던 어머니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지금은 돌봄 대상이 된 두 분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책갈피에 끼워두었던 단풍잎들이 사랑방 창호문 위에서 오후 햇살에 다시 피어납니다. 두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평화가 찾아듭니다.
사랑채 복원 다섯째날 아침 일찍 그동안 든든한 벗이 되어준 정남이와 집앞 함박산으로 산책을 나왔습니다. 구들 놓고 새침까지 긴 공정을 마치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보았습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굴뚝을 바라보자 이내 연기가 힘차게 올라왔습니다. 성공입니다. 구들 복원에 쏟은 지난 5일간의 노고가 한순간 보상받은 느낌입니다. 구들 복원을 기념하여 좋아하는 산수국을 심었습니다. 좋은 시절에 사랑방에 은은히 불을 지펴놓고 벗들과 한잔하기를 기대합니다.
털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야 할 마을회관이 굳게 잠겨 있다. 겨울이면 하루도 쉬지 않고 복을 엮던 손길과 발길이 이어지던 곳이다. 한 해 복을 담을 복조리를 만드는 경기 안성시 죽산면 신대마을이다. 남녘에서 부지런한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텅 빈 들에는 메마른 풀들만 남아 있고 인적이 뜸한 마을 골목에는 찬바람이 서성인다.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엄청 힘들어요.” 집 안 거실에 잘게 쪼갠 대나무가 한가득 놓여 있고 완성된 조리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 가운데서 폐현수막을 펼치고 앉아 이간난(70)씨가 홀로 조리를 만들고 있다. 조금만 움직여도 삐뚤어지기 때문에 발로 단단히 고정하고 억센 대나무를 바느질하듯 한 코 한 코 엮어야 한다. 복조리를 엮고 있는 주름진 손이 나무껍질처럼..
함박눈이 내린다. 산과 들 그리고 꽁꽁 언 강물 위로 소복이 내려앉는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산하가 어느새 순백의 세상이 됐다. 눈발을 헤치며 누렁이가 앞서가고 지게를 멘 주인이 뒤를 따라 다리를 건너고 있다. 그 정겨운 모습에 왠지 모를 그리움이 일렁인다. 강원 영월군 평창강 판운리 섶다리 풍경이다. “내 별명이 지게 도사야. 하하하.” 설을 앞두고 다리 건너 이웃 마을에 다녀온다는 하창옥(74) 씨가 불콰해진 얼굴로 호탕하게 웃는다. 발채를 얹은 지게 위에는 짐이 가득하다. 젊을 때 지게질깨나 했다며 지금도 일을 할 때 지게가 요긴하단다. 신작로가 뚫리고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지만, 강 건너 이웃 마을에 갈 때면 이 다리가 제격이다. 강 건너 이웃집에서 약주 한잔 걸치고 산이(풍산개)와 함께 집으로 ..
어느 해부턴가 아버지 무덤가에 하나둘 피어나던 구절초가 올해는 무리 지어 피었습니다. “참 좋다.” 밭에서 일하다 고단한 허리를 펴시고는 파란 가을 하늘을 보며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키가 크신 아버지처럼 아홉 마디 훌쩍 자란 구절초가 하늘을 우러르며 활짝 웃고 있습니다. 구절초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 은은한 구절초 향기가 아버지 넋이 되어 헛헛한 내 마음을 다독여줍니다.
달덩이 같은 호박이 해먹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양파 망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딴 애들은 땅바닥에 뒹구는데 “저 호박은 좋겠다!” 하자 어머니 하시는 말씀. “큰 덩치에, 매달려 있으려면 얼마나 힘들겠냐! 그것들도 한 식군데…….” 구수한 호박잎과 애호박도 잘 먹었는데 찬바람이 나니 따끈한 호박죽 생각이 납니다. 그러고 보니 호박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 다 내어주면서 늙어가는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바람이 분다. 기다렸다는 듯 수천 개의 바람개비가 일제히 돌아간다. 언덕에서 잠자던 거인 조각상들이 기지개를 켜고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바람개비 앞에서 셀카를 찍던 연인들은 수줍게 입맞춤을 한다. 평화의 바람이 부는 곳,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이다. 휠체어가 햇살에 반짝인다. 부인과 함께 외출 나온 이승민(78) 씨가 휠체어에 앉아 바람개비를 본다. 평생을 섬유업계에서 일하다 은퇴 후 텃밭을 가꾸며 알콩달콩 살아가던 중 4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날벼락 같은 일로 한동안 망연자실했지만, 부인의 지극정성 간호로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더 이상 해줄 게 없어 안타까워요.” 부인에게 늘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 씨가 담요를 덮고 바람 부는 곳을 향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집 안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맞..
산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깃든 침묵 때문일 것이다. 늘 그랬듯이 지리산은 말없이 지친 마음을 보듬어 준다. 천왕봉으로 향하는 길목인 경남 산청 중산리 산자락에 대숲이 눈에 들어온다. 한 줄기 바람이 대숲을 스치자 댓잎 쏠리는 소리가 청아하다. 눈을 감고 복잡한 일상들을 하나씩 바람에 날려 보낸다. 쏴아 하는 댓잎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감미로운 향기가 코끝에 스며든다. 찔레꽃 향이다. 그 향기를 따라가다 대숲 끝자락에서 찔레꽃을 따고 있는 전문희(58) 씨를 만났다. 차를 만들기 위해 꽃과 새순을 따고 있다. “찔레꽃 향기는 내 어머니 체취 같아요.” 찔레꽃이 필 때면 유독 어머니가 그리워진다는 전 씨는 하얗게 피어난 꽃을 보면 산자락 어디를 가도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는 것 같다고 한다. 그녀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