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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가을 들녘을 걸어갑니다. 누렇게 영글어가는 벼 이삭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겨 옵니다. 논배미 옆 사과밭에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빨간 등을 켜고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것 같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모진 가뭄과 무더위 그리고 태풍까지 저 열매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들뜬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어쩌면 우리네 삶도 저 사과와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가면서 갑자기 닥친 시련을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단맛이 나고 무르익는 성장의 과정이라는 것을….
가을을 오랫동안 붙잡고 싶어 단풍잎들을 책속에 끼워두었습니다. 책갈피에서 잘 마른 단풍잎들이 시골집 사랑방 낡은 격자문 위에서 오후 햇살을 받으며 다시 피어납니다. 어릴 적 손자들이 들락거리는 문은 오래 가지 못해 할머니는 창호지를 덧대 마른 풀꽃이나 단풍잎 등을 넣으셨습니다. 궁핍함 속에서도 삶의 여유를 잊지 않으셨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유년의 추억과 함께 피어오릅니다.
고동색 알밤 삼 형제가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여름내 뾰족한 가시로 무장하고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열매를 꼭꼭 품고 키우던 밤나무들입니다. 급한 마음에 억지로 밤송이를 털어서 알밤을 꺼내면 가시를 세우며 쉽게 열매를 내주지 않던 밤나무가 찬바람이 불자 순순히 열매를 내어 줍니다. 무르익는다는 것은 참고 견디어 내는 것, 그리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란 진리를 밤나무에게 배웁니다. 인생의 가을이 왔건만 아직 가시를 내세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유난스러웠던 날씨에도 풍성한 열매를 맺고 깨달음까지 선물한 밤나무가 고맙습니다.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연보랏빛으로 가을 들머리를 물들이던 벌개미취 꽃이 어느덧 백발이 되었습니다. 자식을 멀리 보내는 애끓는 부모마음 처럼 뽀얀 솜털씨앗을 잔뜩 움켜쥔 채 좀처럼 놓지 못합니다. 한차레 세찬 바람이 불자 더는 미련없이 씨앗을 훌훌 날려보냅니다. 솜털에 싸여 산으로, 들로 날아가는 여린 생명들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내년에 보랏빛으로 우리를 반길 것입니다. 희망이 품었기에 꽃은 활짝 피었을 때보다 새생명을 떠나 보낼 때 더 아름다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 글 김선규기자
아름다운 가을빛을 모아 봤습니다. ^ ^ 가을날/ 릴케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던져 주시고 들판녘에는 바람을 놓아주십시오. 마지막 남은 열매가 무르익도록 하명하여 주시고 남국의 날씨를 이틀만 더 베풀어 주소서. 무르익어라 이들을 재촉하여 주시고 마지막 남은 단 맛이 포도주에 듬뿍 베이게 하소서.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짓지 않습니다. 이제 고독한 사람은 오래오래 고독을 누릴 것입니다. 밤을 밝혀 책을 읽으며 긴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에 잠기면 가로수 길을 마냥 헤매일 것입니다. 잎이 휘날리는 날엔... . 그냥 돌아가지 못하고 시를 적는 무례함도 가을날의 서정때문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