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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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그대, 태안으로 가려거든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7. 15:10

 

- 안면도 바람아래 해수욕장

바다를 머금은 바람이 온몸으로 스며든다. 낮게 출렁이는 바다와 고운 모래갯벌, 하늘을 나는 갈매기에도 바람이 묻어있다. 바다를 실은 바람이 머물다 가는 곳, 안면도 끝에 있는 바람아래 해수욕장이다. 그곳에는 원색의 수영복을 입고 거니는 연인들과 물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가득 실려 온다.

모래갯벌에는 수많은 숨구멍들이 있다. 소라게 수만큼이나 다양한 소라껍질을 뒤집어쓰고 소라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게들이 만들어놓은 모래무덤들이 모래사장에 거대한 그림을 만들어놓는다. 그 한편에 아이들과 쭈그리고 앉았다. 맛조개를 잡으려고 준비해간 모종삽으로 모래를 떠서 숨구멍에 소금을 뿌렸다. 한동안 기다려도 맛이 나오질 않았다. 하릴없이 모종삽으로 모래를 팠다. 아예 깊이 파서 개울을 만들어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파들어 가는데 문득 까만색 모래층이 나온다. 이게 무엇일까? 기름일까?

지난 기름유출사고로 태안 일대 바다와 해안가가 검게 뒤덮였을 때, 그 안타깝던 마음이 생각났다. 주민들의 눈물방울과 몰려드는 자원봉사자들의 땀방울로 기름때를 닦아낼 때 당장 내일이 아니라고 뒷짐 진 채 모른 척 했던 마음도 들추어졌다. 검은 바다가 아픔을 속으로 삭이며 스스로 정화되기까지의 눈물겨운 노력들을 애써 외면하지 않았던가. 태안이 옛 모습을 거의 되찾아가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목적지를 태안으로 정했던 건 그런 죄스러움 때문이었다.

사고이후 8개월이 지난 지금, 바다는 기적적으로 제 모습을 되찾았다. 어디를 보아도 검은 죽음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안면도에서도 제일 끝 바람아래 해수욕장을 찾았을 때 잘생긴 소나무 숲과 아늑한 모래사장, 그리고 갯바위에서는 푸른  빛이 싱싱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마음 놓고 있었다. 바다는 넓으니까, 바다는 대자연이니까, 내가 굳이 마음 쓰지 않아도 괜찮아지지 않았냐고 그렇게 위안하면서. 한 번 와보지 못한 미안함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런데 파헤쳐진 검은 모래의 흔적은 깊은 상처를 다시 건드리고 말았다. 당혹스러웠다.  이 까만 모래는 기름유출사고의 흔적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이거 기름인가?'하는 반응이다. 태안 주민들의 생존을 위하여 "춤추는 바다! 태안"이라는 깃발아래 태안 해수욕장이 완벽하게 복원되었으니 다시 찾아와달라는 캠페인이 벌어지는 마당에 아픔의 기억일랑 덮어두어야 했다. 말끔해진 모습을 보여주며 이제 정말 괜찮다고 믿고 싶은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으로, 이제는 더 이상 걱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무심함으로 사고의 흔적일랑 꼭꼭 묻어두어야 했다.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겼다. 바다의 품에 안기면서 마음 한쪽이 아릿했다. 검은 기름때를 벗고 깨끗한 바다로 거듭나기까지 얼마나 애썼을까. 바다의 품에 깃들어 사는 수많은 작은 생명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시름은 또 얼마나 깊었을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한 척 하지만 남몰래 숨죽여 우는 가장의 고독한 뒷모습을 바다에서 보았다면 그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어스름 저녁, 붉은 해를 빨아들이는 바다는 지쳐보였다.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바다는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천천히 슬픔을 삭이며 치유되고 있는데, 인간은 서둘러 상처를 덮어버리고 괜찮아질 것을 바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아직은 더 아프고 슬퍼해야 하는데 이제는 그만 울고 씩씩해지라고 그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나는 결국 검은 모래를 다시 덮어 두지 않았다. 그 검은 모래를 보며 온통 기름띠로 뒤덮인 절망적인 상황에서 당장 내일이 아니라고 곁에 있어주지 못한 내 자신을 한없이 부끄러워했다. 애써 깨끗한 모습만 보면서 이제는 괜찮다고 믿고 싶은 얄팍한 마음도 내려놓았다. 이제, 태안으로 가려거든 괜찮다는 섣부른 위로의 마음도, 회복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의심스런 마음도 다 두고 가리라. 꾸준히 제 모습을 찾아가는 태안에게 고마운 마음과 아직도 깊은 바다 속에서 또 모래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그 아픔을 그렇게 있는 그대로 느끼리라.

 

찾아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서산나들목에서 나와 태안읍내까지 간 뒤 32번 국도로 가면 만리포 해수욕장이 나온다. 77번 국도를 타고 가면 몽산포를 거쳐 안면도 바람아래 해수욕장까지 갈 수 있다. 바람아래 해수욕장 바로 옆에는 서해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꽃지해수욕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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