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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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가시연을 위한 변명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7. 15:16

 

- 경상남도 창녕군 우포늪


이 세상 모든 것이/그저 노엽고 싫게만 보이던 어느 날
슬금슬금 가리워진 등짝에서는/뾰족 가시가 하나둘/돋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다 가을이 되자/아득한 물 위에 가시만 남겨두고
넓은 잎은 덧없이 녹아/물속에 가라앉고 마는 것이었다 (이동순 ‘가시연꽃‘ 중에서)

누구를 향한 분노인가. 수면 위를 가득 메운 커다란 연잎에는 무수히 가시가 돋아 있다. 가시연(蓮)이다. 그저 모양만 가시인 줄 알았더니 연잎 빼곡히 날카로운 가시가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찌를 태세이다. 잎의 앞쪽만이 아니라 굵은 잎맥이 드러나는 뒤쪽에도 어김없이 가시가 나 있다. 한가로이 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가시연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원시적 자연 생태계의 보고인 경남 창녕의 우포로 떠난 여행이었다. 서둘러 출발했지만 우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낮의 땡볕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여름의 끝에서 뜨거운 햇살 아래 드러나 보이는 우포는 마치 잡초가 우거진 짙푸른 들판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햇볕 속에서 눈살을 찌푸리고 그늘을 찾다가, 우포 지킴이의 도움으로 나무배를 타고 늪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개구리밥·마름·생이가래 등이 물 위를 뒤덮고, 소금쟁이·물거미들이 분주했다. 1억4천만 년 동안 물이 흘러 들어오고 흙이 쌓여서 만들어진 늪이라니…….  드넓은 수면을 촘촘히 메운 식물들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늪에서 태고의 원초적 숨결이 전해지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쯤을 가다가 널찍한 가시연이 융단처럼 펼쳐진 가시연 군락지를 만났다.
  일반적인 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잎도 잎이거니와 잎 위에 잔뜩 돋아 있는 가시도 독특했다. 가시연꽃도 보았다. 진보랏빛 꽃잎을 빼고는 꽃받침도 꽃대도 모두 섬뜩한 가시투성이였다. 무심코 잎을 만지려다 그만 가시에 찔렸다. 찔린 손가락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저 호기심에 다가갔을 뿐인데 가시연은 어느 누구도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지 않는 듯, 가시를 잔뜩 세운 채 적의를 내뿜었다.

 왜 그토록 가시를 세우고 있는 것일까. 우포를 둘러보는 내내 가시연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물에 반쯤 잠긴 왕버들이 초록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푸른 늪 위에 점점이 떠 있는 백로들이 더없이 평화로운 풍경을 그려내는데, 왜 가시연은 건드리기만 하면 찌를 듯한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살다 보면, 온 몸에 가시가 돋을 때가 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분노는 뾰족한 가시가 되어 내 몸에서 돋아났다. 그럴 때에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독기어린 말로 가시를 퍼부어 댔다. 그렇게 분노와 증오로 내뱉는 한 마디 한마디로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가.
  사소한 이유로 감정이 폭발해서 아이들에게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험한 말들을 마구 쏟아낸 적도 많다. 어느 순간, 엄마의 화난 모습에 놀라 훌쩍거리는 아이를 보며 문득 내 어린 날이 떠올랐다. 화내는 부모 앞에서 늘 주눅이 들고 어쩔 줄 몰랐던 기억들, 옴쭉도 할 수 없었던 그 눈빛, 내 몸에 쏟아져 가시로 박혔던 기억들……. 
 

내게 박혀 있던 가시는 그 깊이만큼 내 몸에서 더 날카로운 가시로 자라났다. 보란 듯이 잘 키워서 엄마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심과 내가 못 이룬 꿈을 아이들이 대신 이루게 하려는 한풀이까지 덧씌워졌다. 결국 내게 가시는 마음의 상처와 열등감 때문이었다. 더 이상 상처를 입으면 추스를 수 없을 것만 같아 아프고 여린 마음을 서슬 퍼런 가시 속에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가시에 찔릴 때 나는 그보다 더 아파야만 했다. 

오염된 물을 정화하고 상처 입은 생명을 품어 주는 우포늪에서, 가시를 돋우며 적의를 불태우던 가시연들이 이제 창끝 같은 꽃대로 제 잎을 찢고 여린 꽃잎을 피워 올린다. 남들을 위협하던 가시로 제 가슴을 찌르며 비로소 처절한 꽃을 피운다.
  왠지 가시연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미소 띤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가시보다 가시연의 그 가시는 얼마나 솔직한가. 강한 자에게는 화내지 못하고 약한 자에게는 마구 퍼붓는 모습보다 가시연의 분노는 얼마나 당당한가. 끝내 비수의 끝을 자기 내부로 돌려 스스로 고행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가는 가시연의 수행은 또 얼마나 높은 경지인가.
  우포늪에는 지금 가시연꽃이 한창이다. 제 잎을 뚫고 불쑥불쑥 솟아오른 꽃들이 눈부신 하늘을 우러른다. 그 처절한 아름다움 위로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쏟아진다. 

                                                                                                         글. 최경애(수필가)  사진. 김선규(생명다큐 사진작가)

 

 

찾아 가는 길
원시의 숨결이 가득한 자연생태계의 보고 우포늪에서는 2008년 10월에 람사르총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우포늪으로 가려면,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창녕나들목으로 빠져나온다. 교차로에서 우회전 한 후 이정표를 따라가다 회룡마을에서 다시 우회전하면 우포늪 세진주차장이 나온다. 우포홈페이지 www.up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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