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2-6 눈높이(그들의 눈높이에 서서 바라보았더니..) 본문

자료실/아빠와 아들의 사진산책

2-6 눈높이(그들의 눈높이에 서서 바라보았더니..)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3. 15:05

<준우>

평소 길을 걷다가 발목이 간질거려서 내려다 보면 조그마한 풀들과 꽃들이 그 범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겨우 내 발목까지 밖에 미치지 않는 풀들이나 꽃들을 별로 심중하게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어라, 못 보던 풀이네”, “예쁜 꽃이네”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았었다. 가끔 귀엽거나, 사연이 있는 것 같은 꽃을 보면 사진으로 담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연신 고개를 떨구고, 허리를 굽혀도 사진은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에잉, 한낱 조그마한 꽃 따위. 원래 별로인데 사진으로 담으려 해도 오죽하겠어” 라며 포기를 해버렸다. 

오늘도 산책을 하던 중 어김없이 귀여운 꽃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어차피 사진으로 담아도 예쁘게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아빠가 갑자기 “그들과 눈 높이를 같이 하고 사진으로 담아내려고 노력해봐” 라고 충고를 해주시며 시범을 보여주셨는데 처음에 나는 당혹스러웠다. 아빠가 갑자기 배를 땅에 닿게끔 퍽 엎드려 버린 것이다. 아직도 남을 의식하는 습관을 가진 나에게는 아빠의 이런 행동이 정말 당혹스러웠다. 아빠의 권유에 나는 마지못해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배를 땅에 대고 카메라에 눈을 대었다.

그 후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내 눈앞에는 신세계가 펼쳐졌다. 노란 얼굴을 한 친구들이 내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보니 왠지 내가 그 꽃들과 같은 꽃이 된 기분이었고, 그래서인지 그 꽃들이 단순히 식물이 아닌 아름다운 생명 그 자체로 보였다. 그 동안에 이들의 아름다움을 알아봐주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전에는 보거나 느낄 수 없었던 그 작은 풀과 꽃들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에 매료되어 나는 한참 후에 나는 무언가에 이끌려 조심스레 셔터를 눌렀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각각의 눈 높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가치를 깨달으려면 우선 그들과 눈높이를 같이 해야 하는 것 같다. 자세를 높이거나, 혹은 낮추어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눈높이를 공유할 때, 그때만이 비로소 그들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부여되고 그 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아빠가>

오늘 준우가 본 작고 노란 꽃 이름이 무엇인지 아니?
봄이면 어김없이 집 앞 도로에 노랗게 피어나는 ‘꽃다지’란다.
사람들이 살기 편하게 만든다고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땅을 다 덮어도
한 줌의 흙이라도 있는 곳이면 꿋꿋하게 몸을 일으켜 세워
민초들의 꽃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아빠도 이 꽃말과 의미를 알고 나서부터 꽃다지를 무지 좋아하게 됐어.
오늘 준우가 아빠가 좋아하는 꽃다지를 통해 아주 귀하고 값진 것을 깨달아 정말 기쁘구나.

준우가 꽃다지의 높이에 눈높이를 맞추고 바라보니 전에 보던 모습과 다르게 보인 것처럼 이 세상 모든 만물은 그들 눈높이 에서 바라본다면 그전에 보던 모습과 확연하게 다른 보습을 보여 줄 거야. 즉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사랑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어. 아빠가 꼬마 준우와 함께 놀 때면 늘 눈을 맞추며 놀곤 했지. 그러면 너도 무척 좋아했지. 서로 눈높이를 맞추면서 세대차를 뛰어넘는 깊은 공감대가 형성 되었을 거야.

그 눈높이라는 것은 공간적 눈높이도 있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지. 이 세상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삶의 어울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거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도 마찬가지야. 소위 생명사진작가로 불리기를 원하는 아빠가 지극히 평범하지만 위대한 이 진리를 깨닫는 데는 실로 많은 시간이 걸렸단다.

아마 2003년으로 기억되는데 벚꽃이 분분히 휘날리던 어느 봄날로 기억된다. 대학로에서 취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었지. 마감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시내에서 차가 꽉 막혀서 꼼짝도 하지 않고, 답답한 마음에 차에서 내려 부지런히 걸어보지만 북적이는 거리에서 사람들 어깨만 부딪힐 뿐이었어. 뛰어도 보았지만 이미 마감(신문사에서 마감시간을 데드라인이라고 해서 이 시간을 넘기면 곧 죽음 같다고 해 마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지)은 물 건너 간지 오래였고. 맥이 탁 풀렸어.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까?’
이런 생각을 하며 계속 울려대는 휴대폰을 끄고 경희궁터를 터벅터벅 걸었지.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 보니 뭉게구름만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어. 공원 한쪽에 참새 다섯 마리가 놀고 있는 모습도 보였지. 멀거니 앉아서 보고 있는데, 신나게 놀던 참새 한 마리가 목이 마른지 수돗가를 기웃거렸어. 수도꼭지를 한참 바라보고 있는 참새가 귀여워서 카메라의 포커스를 맞추고 속으로 중얼거렸어.
‘물방울아, 제발 떨어져다오!’

살다보면 종종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지곤 하지. 꼭꼭 잠겨 있던 수도꼭지에서 물 한 방울이 떨어졌고, 참새는 날렵하게 날아올라 물을 마셨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슬로우 비디오를 보듯 참새의 동작 하나 하나가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빨려 들어왔어. 짧은 순간이지만 긴 여운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았어.
‘참새들도 신나게 놀다 보면 목이 마르구나…’
‘목이 마르다는 것은 삶을 향한 몸부림이 아닌가!’
순간,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오랫동안 가슴속에서 침묵하던 그 무언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어.

 

아빠는 이 ‘마른 참새’를 만난 후 우리주변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생명체들을 만날 수 있었단다. 늘 그자리에서 있었는데 아빠가 보지 못했던 거지. 그것을 그들을 눈높이에서 바라보지 못했고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마음의 눈이 감겨있었던 거야.
지금도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들을 위한 배려를 찾기 힘들지. 그저 인간들의 편리와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고 그것을 쫒아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 조금만 눈을 돌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동식물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이런 모습을 통해 삶의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되지. 그들은 결코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법이 없지.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인다고 했지. 그리고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았던 것과 다르게 보이는 법.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들을 그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세상이 달라 보였어. 집밖을 나서면 아파트 화단에 꽃들이 인사를 하고 발밑에 있던 작은 생명들이 말을 건네 왔지. 남들이 봄이 짧다고 하지만 긴 겨울을 이기고 새로 얼굴을 내민 작은 풀들과 새싹을 바라보는 재미에 아빠의 봄은 그 어느 계절보다 길고 설레임으로 가득하지.

 

###  눈높이에 대하여 ###

사진을 즐기면서 제일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새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래 두 사진은 단풍이 절정일 때 12층에 위치한 집 베란다에서 바라본 호수로의 풍경과 호수로에서 집을 바라본 모습이다. 카메라의 앵글이 달라지면 피사체와 배경의 모양이 확연히 달라진다.

 

 

카메라 앵글이란 촬영하는 위치나 카메라의 방향을 말한다. 피사체보다도 낮은 위치에서 촬영하는 것을 ‘로우 앵글’ 촬영자의 눈높이에서 촬영하는 것을 수평앵글(아이레벌), 피사체보다 높은 위치에서 촬영하는 것을 ‘하이 앵글’이라 부른다. 단순히 지면에 앉거나 눕거나 의자 위에 올라가는 것뿐만 아니라 빌딩 위나 산에 올라가 풍경을 담아낸 것 역시 카메라 앵글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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