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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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모든 이가 소생하게 하소서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8. 19:39

- 내소사에서

여행을 떠나며 애써 묻어두거나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조금쯤 놓아두었던 세상살이들,
사람들은 그 힘든 현실을 이곳에서 다시 돌아본다.
그리고 여리지만 따뜻한 삶의 속살을 내비친다. 
알록달록 매달린 소원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닮은꼴이었다. 

 

어딜 둘러보아도 드넓은 눈밭이다. 며칠 계속 내린 눈으로 마을이 두터운 눈이불을 덮고 있다. 내소사로 향하는 길에도 눈부신 설경이 펼쳐진다.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길을 걷는다. 드문드문 깔린 산죽이 눈 속에서 더욱 푸르다. 오랜만에 눈을 실컷 보는 아이가 눈 속을 뛰어다닌다. 여행이란 이런 걸까. 잡다한 일상의 근심도 걱정도 잠시 눈 속에 덮어둘 수 있는……. 천방지축 좋아하는 아이와 함께 눈 덮인 내소사의 아름다움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천왕문을 지나자, 흰 능가산에 안겨있는 내소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더 마음이 가는 모양이다. 둘이서 눈덩이를 하나씩 굴려서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나뭇가지로 눈, 코, 입을 붙이니 신기하게도 표정이 생긴다. 만든 사람의 손길과 입김, 그리고 염원 같은 것이 함께 뭉쳐져서일까. 생명감마저 느껴진다. 두고 가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닌텐도 사게 해주세요.” 봉래루 이층 누각아래서 한 꼬마아이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소원을 적고 있다. 새해 소원붙이 행사가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곳에는 누구든지 소원을 적을 수 있도록 작은 종이와 펜이 마련되어있고, 누각 기둥 사이로 연결된 수많은 줄에는 알록달록한 소원쪽지가 촘촘히 매달려있다.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주세요.”, “부자 되게 해주세요.”, “대학 합격!!”, “전교 1등하게 해주세요.”등 소원도 다양하다.

 

아이와 함께 소원을 적기로 했다. 무슨 소원을 적을까 망설이는데 아이가 ‘엄마, 아파트 팔게 해달라고 적으세요.’한다. 하긴 요즘 제일 골치 아픈 문제이다. 분양받은 아파트에 입주 날짜가 지난 지 석 달째, 이사 갈 형편이 안되서 팔려고 내놓았는데 값은 자꾸 떨어지고 사려는 사람도 없다. 누구에게 부탁하거나 매달리는 데 익숙지 않은 나였다. 하지만 아이의 성화를 핑계 삼아 소원을 적어 두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지만 다른 소원들을 읽을수록 마음이 진지해진다. “사랑하는 아우야, 그 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편히 눈감고 편히 쉬어라.”, “다시는 사기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올해 네가 하는 일 다 잘될거야. 조금만 더 힘내!!”……. 여행을 떠나며 애써 묻어두거나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조금쯤 놓아두었던 세상살이들, 사람들은 그 힘들었던 현실을 이곳에서 다시 돌아본다. 그리고 저마다 숨겨두었던 여리지만 따뜻한 삶의 속살을 내비친다. 우리는 너무나 닮은꼴이지 않은가.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들의 모습이고 내 모습이기도 하다.

 

대웅보전을 둘러보는 내내 소원쪽지들에 자꾸만 마음이 갔다.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가 소생하게 하소서”라는 뜻을 담은 내소사(來蘇寺)에서 작은 종이는 누군가를 만나서 소원쪽지로 살아났다. 사람들이 쏟아놓는 설움과 상처 그리고 소망이 종이에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일까. 때로는 천진한 어리광으로 때로는 참았던 눈물로, 그 순간 삶의 흔적을 간직한 채 저마다 다른 얼굴로 펄럭인다. 

 

내가 적은 소원종이를 보자 잠시 걱정이 밀려온다. ‘아파트가 빨리 팔려야 할 텐데…….’ 함께 걸려있던 다른 소원 쪽지들이 내게 위로를 건넨다. 살기가 어렵고 힘들수록 가족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많은 소원들. 그래,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리라. 살아가는 일이 녹록치 않더라도 다시 부딪히며 살아가리라. 어쩌면 다시 소생한다는 것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낼 수 있을 때 그리고 곁에서 다독거려 줄 누군가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전나무 숲길을 걸어 나가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부동산중개업소였다.     

글. 최경애(수필가)  사진. 김선규(생명다큐 사진작가)

 

찾아가는 길
전나무 숲길이 아름다운 내소사는 대웅보전의 단청과 꽃창살이 특히 유명하다. 서해안고속도로나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줄포IC에서 빠져나온다. 보안사거리에서 좌회전한 다음 곰소를 지나 직진하면 내소사 주차장이 나온다. 문의 :내소사 063-583-7281 http://www.naeso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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