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46)
빛으로 그린 세상
- 안면도 바람아래 해수욕장 바다를 머금은 바람이 온몸으로 스며든다. 낮게 출렁이는 바다와 고운 모래갯벌, 하늘을 나는 갈매기에도 바람이 묻어있다. 바다를 실은 바람이 머물다 가는 곳, 안면도 끝에 있는 바람아래 해수욕장이다. 그곳에는 원색의 수영복을 입고 거니는 연인들과 물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가득 실려 온다. 모래갯벌에는 수많은 숨구멍들이 있다. 소라게 수만큼이나 다양한 소라껍질을 뒤집어쓰고 소라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게들이 만들어놓은 모래무덤들이 모래사장에 거대한 그림을 만들어놓는다. 그 한편에 아이들과 쭈그리고 앉았다. 맛조개를 잡으려고 준비해간 모종삽으로 모래를 떠서 숨구멍에 소금을 뿌렸다. 한동안 기다려도 맛이 나오질 않았다. 하릴없이 모종삽으로 모래를 팠다. ..
- 경기도 양평 봉미산 휴대폰을 켜 둔 게 잘못이었을까. 일상을 떠나 찾아온 숲이었다. 번다한 일상일랑 잠시 접어두고 진초록 숲의 향기에 흠뻑 취하며 그렇게 몸도 마음도 쉬리라 생각했었다.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 남짓 달려왔는데 울창한 산림이 창밖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깊은 산그늘과 그윽한 숲 향기를 만끽하며 조금씩 자연에 동화되어 가는데 느닷없이 휴대폰이 울린다. 중학생 둘째 아이다. 동생을 혼자 두고 아침부터 친구들과 영화를 보겠다는 아이에게 벌컥 화를 내버렸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며칠 전부터 동생을 돌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자기 밖에 모를까. 잠시 밀쳐두었던 잡다한 일상들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시험기간인 큰아이는 공부를 하고 있는지, 작은 아이는 컴퓨터게임을 너무 오래하는 건 아..
-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배는 군산항을 떠나면서도 오랫동안 군산의 공장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망망대해. 안개는 바다를 신비롭게 만들었다. 흩날리는 안개와 짭짤한 바람에 온몸을 적시며 문득 나는 지금 어느 세계로 가고 있는 걸까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얼마쯤을 그렇게 달리자 뿌연 안개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섬들의 나라였다. 온몸을 바닷바람에 흠뻑 적시고 마음도 바닷물로 씻어야 들어갈 수 있는 섬들의 나라……. 고군산군도의 맏형 뻘 되는 선유도에 내리면서 나는 동화의 나라라도 들어온 듯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맨 처음, 비릿한 바다냄새가 온 몸 가득 빨려 들어왔다. 냄새만 맡고도 밥 한 그릇 먹겠다는 농담이 오갔다. 햇살과 바람이..
- 강원도 정선군 칠족령 눈물이 나려고 한다. 칠족령에서 바라본 동강은 맑은 햇살 아래 온전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아득한 산줄기 사이로 강물은 산굽이를 에워 돌고, 산은 강줄기에 제 몸을 내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산을 만나 굽이치고 휘돌아가는 물줄기와 깎아지른 푸른 절벽이 어우러지는 평화로운 풍경에 나는 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일까. 그동안 몇 차례 동강에 들렀었다. 비오는 날 동강을 유유히 헤엄치던 비오리 가족들, 소사마을의 높다란 황토 담배 건조막, 그리고 강물을 사이에 두고 두 마을 사이에 줄배를 띄워 건너가던 풍경은 모두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그 옛날 험한 물살에 목숨을 걸고 뗏목을 나르던 뗏꾼들의 아라리 가락도, 동강댐을 둘러싸고 들끓던 그 많은 소리들도 강물에 실려 떠내려갔지만, 억겁..
- 경기도 남양주군 천마산 “누구 찾아요?” “노루귀?” 몸을 잔뜩 숙이고 땅만 바라보는 내게 지나가는 등산객이 물었다. 뜬금없이 누구 찾느냐는 물음에 살풋 웃음이 배어났다. 이곳에 자주 오는 등산객들에게는 노루귀가 산 속에 사는 친구쯤 되는 모양이다. 이른 봄에 피는 야생화를 찾아 천마산에 오르는 길이었다. 겨우내 언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야생화들이 활짝 반겨줄 건만 같았던 산자락에는 마른 낙엽들만 뒹굴었다. 산은 그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화사한 봄빛 대신 회갈색의 암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회색 도화지에 노란 물감을 흩뿌린 듯 생강나무 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나뭇가지에는 좁쌀만 한 잎새들이 촘촘히 돋아나고, 발아래에는 푸릇푸릇한 싹들이 땅위로 솟아났다. 솔잎..
- 북제주군 애월읍 금산공원 제주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요즘은 제주의 소리가 참 좋을 때입니다.” “네? 소리요?” “소리요…….” 공항으로 마중 나온 지인의 말이 엉뚱하게 들렸다. 그는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다. 제주가 그리워서 뭍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었던 그는 다시 돌아와 제주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는 아마도 제주를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소리로 듣는 모양이었다. 거친 바람 소리와 간간히 흩뿌리는 빗소리 그리고 굉음 같은 파도 소리뿐, 제주는 내게 도대체 그 ‘소리’라는 걸 들려주지 않았다. 토박이들을 품어주는 제주와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제주는 다른 얼굴인 모양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도 큰 공원이 있는데, 입구에서 돈을 내고 빌리는 4인승 자전거를 탄 가족이나 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