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46)
빛으로 그린 세상
- 인천시 옹진군 굴업도에서 여행은 낯설음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기꺼이 낯설음을 만나고 그 낯설음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나는……. 갈아타는 불편함과 맞바꾼 호젓함이랄까. 인천항에서 경쾌하게 달리는 쾌속선을 타고 덕적도로 향할 때만 해도 수선스러움과 설렘이 있었다. 덕적도에서 완행여객선으로 갈아타면서 소란스러움도 북적거림도 망망한 바다 속으로 차츰 가라앉았다. 검게 그을리고 주름진 얼굴들, 뱃전에 놓인 올망졸망 보따리들……, 하루에 한 번 주위의 고만고만한 섬들을 차례로 들르는 해양호는 한적한 시골 완행버스를 닮아 있었다. 섬은 고요하다 못해 차라리 적막하다. 드넓은 백사장은 부지런히 들락거리는 바다 물결과 종종거리는 몇 마리 새들 차지이다. 가만히 다가가보니 환경부 지정 멸종 위기 2급이라는 검은머리..
광릉숲 소리봉에서 신록에 이끌려 보고 또 보고 하는 것은 너를 보는 듯한 반가움 때문이야.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키에 순결한 눈망울의 열여섯 살 풋풋한 네 모습이 꼭 5월의 신록을 닮았구나. 그래서 바라만보아도 벅차고 정겹고 고마운 거란다. 준우야, 엄마는 지금 광릉숲길을 걷고 있어. 국립수목원 기억나지? 어릴 적 엄마 아빠와 손잡고 놀러가곤 했잖아. 수목원 입구부터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전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은 언제나 인상적이지. 지금 이곳은 신록이 한창이야. 어디를 둘러보아도 고동색 나무줄기와 화사한 연초록색 잎들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황홀하구나. 숲이 발달하는 천이단계에서 광릉숲은 가장 안정된 숲으로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극상림이라고 해.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세계적인 천연기념물인 크..
- 섬진강 구담마을 매화꽃 그늘아래 나물캐던 내 할머니 같은 얼굴들, 내내 따라 다니던 김치 국물 묻은 강아지, 마음 속 가득 스며들던 섬진강 물소리…….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작은 강변 마을에서 보낸 무료한 하루가 못내 그리워질 것만 같다. 하릴없이 강변에 앉아 있다. 무엇을 할까. 딱히 할 일도 없다. 생각을 하려해도 아무 생각이 없다. 흐르는 물소리만 끊임없이 들려온다. “돌돌돌~ 돌돌~” 같은 곡조가 반복되기도 하고 변주되기도 한다. 결코 끝나지 않는 연주이지만 질리는 법이 없다. 수면 위에는 오후의 햇살이 내려 앉아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영롱하다. 화창한 봄날, 나른한 햇살이 쏟아지는 섬진강변을 찾았다. 강변을 따라 빼곡하게 심어진 매화나무에는 매화꽃이 흐..
- 제주 구좌읍 하도리 어차피 불어올 바람이라면 세상의 한파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리라. 찬바람 안으며 꿋꿋하게 버티리라. 한겨울 모진 추위를 견디고 꽃을 피우다 때가 되면 미련 없이 툭툭 떨어지는 저 동백꽃의 순명처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가 않다. 양지바른 곳에 얼굴을 내민 새싹을 보아도 마음속에는 쌩쌩 찬바람이 분다. 그다지 춥지 않았던 겨울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건 세상살이의 한파에 몸보다 마음이 더 추웠기 때문일까.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건 아마도 그런 봄에 대한 갈증 때문이리라. “제주의 봄은 해녀들의 숨비소리에서 시작되지요.” 바쁜 일정을 뒤로 하고 안내를 자처한 지인은 먼저 해녀박물관으로 이끌었다. 관광객들이 별로 찾지 않는 박물관은 한적했다..
- 내소사에서 여행을 떠나며 애써 묻어두거나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조금쯤 놓아두었던 세상살이들, 사람들은 그 힘든 현실을 이곳에서 다시 돌아본다. 그리고 여리지만 따뜻한 삶의 속살을 내비친다. 알록달록 매달린 소원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닮은꼴이었다. 어딜 둘러보아도 드넓은 눈밭이다. 며칠 계속 내린 눈으로 마을이 두터운 눈이불을 덮고 있다. 내소사로 향하는 길에도 눈부신 설경이 펼쳐진다.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길을 걷는다. 드문드문 깔린 산죽이 눈 속에서 더욱 푸르다. 오랜만에 눈을 실컷 보는 아이가 눈 속을 뛰어다닌다. 여행이란 이런 걸까. 잡다한 일상의 근심도 걱정도 잠시 눈 속에 덮어둘 수 있는……. 천방지축 좋아하는 아이와 함께 눈 덮인 내소사의 아름다움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천왕문을 지나자,..
- 정동진에서 차창 밖으로 성큼 다가온 바다가 넘실거린다. 어느 틈엔가 하늘이 푸르스름하다. 터널 같은 어둠 속을 기차는 몇 시간이나 달렸던 것일까. 동해 해돋이를 보겠다고 무작정 밤길을 나선 길이었다. 마음이 설렌다. 올해는 해돋이를 꼭 보고 싶었다. 아득한 수평선 위로 힘차게 솟아오르는 해를 보고 있노라면, 그 ‘희망’이라는 것이 내 가슴에도 고동칠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면 지난 한 해 동안 살기가 어지간히 팍팍하기도 했었나보다.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꾸 움츠러든다. 희망이라는 보물을 찾아 떠나는 모험가의 심정이랄까. 그 보물을 가득 담아 와서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혼잡을 피해서 하루 일찍 떠났는데도 정동진 바닷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해를 보기..
자연에 순결한 영혼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드넓은 갯벌에 자줏빛으로 물들은 칠면초 군락, 미스터리 서클 같은 동글동글한 모양의 갈대밭, 그리고 이따금씩 하늘을 날아오르는 철새들까지.... 순천만의 노을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해가 산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햇살은 더욱 황홀해지고 물길은 붉게 빛난다. 매서운 찬바람이 온 몸을 휘감지만, 전망대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환호로 물들어 간다. 자연에 순결한 영혼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순천만의 노을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순천만의 바다와 갯벌을 보며, 내 자신이 자꾸만 초라해지는 건 왜일까.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기에는 내 마음이 척박한가 보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무렵에 바라보는 ..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길‘ 중에서) 단풍이 곱게 물든 덕수궁 돌담을 걷다가 멀리서 어렴풋이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순간 반가움과 당황스러움이 교차하면서 가슴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을 줄 알았는데‚ 도저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추억 속에서 늘 청년인 그는 이제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중년이 되어있었다. 그도 나를 보았을까. 그냥 모른 척 지나갈까. 아니면 커피 한 잔을 나누며 내 남편과 그의 아내에 대한 안부를 서로 물어야할까. 엉뚱한 사람을 두고 이렇게 나 혼..
- 강원도 정선군 민둥산 그대, 안녕하신지요? 이곳은 온 산자락에 억새들의 은빛 물결이 출렁입니다. 부스스 부풀어진 억새들이 저무는 햇살을 잔뜩 머금고, 바람 따라 허연 머리채를 이리저리 휘날리는 풍경 너머로 하늘이 성큼 다가섭니다. 이곳 민둥산에서, 가을 하늘을 마주 보고 앉아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시나요? 일상에 묻혀서 분주히 앞만 바라보느라 제대로 보지 못하는 하늘 말입니다. 산동네에 있는 어느 성당을 찾아갈 때였습니다. 좁다란 골목을 지나 꺾어진 길을 오르느라 고개를 들었는데, 낡은 집들 사이로 조각난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렀습니다. 문득 얼마 만에 보는 하늘인가 하는 생각에 울컥했습니다. 왜 그토록 앞만 보고 달렸는지, 그 조각난 하늘을 바라보며 거울 속에 비친 낯선..
- 경상남도 창녕군 우포늪 … 이 세상 모든 것이/그저 노엽고 싫게만 보이던 어느 날 슬금슬금 가리워진 등짝에서는/뾰족 가시가 하나둘/돋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 그러다 가을이 되자/아득한 물 위에 가시만 남겨두고 넓은 잎은 덧없이 녹아/물속에 가라앉고 마는 것이었다 (이동순 ‘가시연꽃‘ 중에서) 누구를 향한 분노인가. 수면 위를 가득 메운 커다란 연잎에는 무수히 가시가 돋아 있다. 가시연(蓮)이다. 그저 모양만 가시인 줄 알았더니 연잎 빼곡히 날카로운 가시가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찌를 태세이다. 잎의 앞쪽만이 아니라 굵은 잎맥이 드러나는 뒤쪽에도 어김없이 가시가 나 있다. 한가로이 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가시연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원시적 자연 생태계의 보고인 경남 창녕의 우포로 떠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