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빛으로 그린 세상/행복편지 (46)
빛으로 그린 세상
뜨거운 햇볕아래 연꽃들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수련, 가시연, 어랑부리연……. 모든 연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냅니다. 세상일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고귀한 꽃들인 줄 알았는데, 뙤약볕을 견디며 혼탁한 진흙탕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살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 두둥실 피어오르고 연꽃봉우리에 앉은 잠자리 한 마리, 그 어느 해보다도 뜨거웠던 여름을 배웅하고 있습니다. 시흥 관곡지에서
어린 막내가 길바닥에다 실례를 했네요. 냄새가 심하지 누나랑 형은 코를 막고 눈살을 찌푸리며 야단을 떱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보면서 문득 가는 곳마다 잠겨 있는 도심의 화장실이 떠올랐습니다. 볼일이 급해 하늘이 노래져본 사람은 그때의 심정이 어떤지 잘 알 것입니다. 누가 똥을 훔쳐간다고 그렇게도 야박한지 모르겠습니다.
낡은 고무신 한 켤레가 왜 이렇게 마음을 끄는지 모르겠습니다. 뒤축이 낡아서 정성스레 꿰맨 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낡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농부의 마음이 그대로 보이는 듯합니다. 꿰맨 고무신은 그래서 궁색해보이지 않습니다. 낡고 오래됐지만 아직도 주인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자부심은 새 것이 받는 사랑과는 비교할 수가 없으니까요. 새 것만 좋아하는 우리 세대를 돌아봅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새 것이 아니라 손때 묻고 정든 물건이라는 것을... 하루가 다르게 기름값이 오르는 요즈음, 그래서 농부의 낡은 고무신이 더 마음에 다가왔나 봅니다.
낡은 화장실 안을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다. 작은 창문 방충망 너머로 기웃거리는 담쟁이 넝쿨. 무엇이 그리 궁금할까? 고 녀석들, 볼 테면 실컷 봐라!
제 막내아들입니다. 아들 셋 중에서 유독 먹을 것에 대해 집착도 많고 욕심도 많습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우동을 먹었습니다. 형들의 젓가락질이 분주해지자 마음이 다급해진 막내는 서툰 젓가락질을 그만두고 그릇째 들고 마십니다. 냄비가 바닥을 드러내자 이번에는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주위의 눈치를 살핍니다. 결국 엄마 아빠 몫을 막내에게 덜어주지만 그래도 자꾸 줄어드는 우동이 아쉽기만 합니다. 형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가는 막내의 생존전략입니다.
장맛비가 숨고르기를 하는 사이 물방울이 맺힌 풀잎 위를 달팽이 한마리가 천천히 걸어갑니다. 너무 오래 걸린다고, 등에 짐이 무겁다고 투정하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제 갈 길을 갑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고 빨라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세상입니다. 잠시 달팽이의 발걸음에 호흡을 마쳐보며 그 느림의 여유를 즐겨봅니다.
물길 열려 바다로 일 나갔던 두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젊은 할머니는 양손에 묵직한 바구니를 들고 앞장서고, 꼬부랑 할머니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부지런히 그 뒤를 따라갑니다. 갯것을 캐며 늙어가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입니다. 긴 여운을 남기며 그렇게 함께 걸어가는 발자국을 보면서, 반평생을 함께 하셨던 내 어머니와 할머니를 생각합니다. 억척스럽게 헤치고 온 두 여인의 고단한 삶이 연민과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2003/충남 태안
시간마저 정지한 듯 고요한 늪 둑을 걸어갈수록 팽팽한 고요 속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집니다. 생명의 수런거림이 들려옵니다. 그것은 억겁의 세월을 살아 숨쉬어온 생명의 땅, 우포의 숨결입니다. 2003/창녕
‘빠앙~, 칙칙폭폭, 칙칙폭폭’ 세 칸짜리 기차가 선로 위를 미끄러지자 노란 꽃무리가 출렁입니다. 어릴 적 기찻길은 외부 세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의 대상이었지요. 그래서인지 기차는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어릴 적 잃어버린 꿈과 추억으로 다가옵니다. 오늘도 기차는 추억을 싣고 마음 속 고향으로 달려갑니다. 2005/전남 화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