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빛으로 그린 세상/행복편지 (46)
빛으로 그린 세상
달덩이 같은 호박이 해먹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양파 망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딴 애들은 땅바닥에 뒹구는데 “저 호박은 좋겠다!” 하자 어머니 하시는 말씀. “큰 덩치에, 매달려 있으려면 얼마나 힘들겠냐! 그것들도 한 식군데…….” 구수한 호박잎과 애호박도 잘 먹었는데 찬바람이 나니 따끈한 호박죽 생각이 납니다. 그러고 보니 호박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 다 내어주면서 늙어가는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기린, 쥐, 강아지, 오리, 곰, …. 지루한 장마 틈에 하늘에 ‘동물의 왕국’이 펼쳐졌다. 바람이 부는 대로 뭉쳤다 사라지며 구름은 다양한 동물들을 만들며 잊고 있던 동심을 깨운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이 구름처럼 일순간 뭉쳤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동심으로 돌아간 이 순간 기자도, 아빠도, 그 누구도 아닌 난 밀림의 왕자.
“아빠다!” 엄마와 놀던 아기 비오리 두 마리가 쏜살같이 아빠에게 달려갑니다. 먹음직한 물고기를 입에 물고 가족에게 달려가는 아빠 비오리의 발놀림이 경쾌합니다. 어린 시절, 퇴근하시는 아버지께 인사를 하면서도 눈길은 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꾸러미에 먼저 가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늘 기다림과 설렘의 존재였습니다. 아이들이 다 커서 둥지를 떠났지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퇴근길 제 손에는 봉지 하나 덩그러니 들려있습니다.
멀리 능선 위로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이 순간만은 삼라만상이 숨을 죽이는 듯하다. 마침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솟아오르는 붉은 덩어리. 어둠과 추위를 헤치며 산등성에 올라선 사람들. 일제히 환호성과 함께 희망찬 마음으로 저마다의 새해 소망을 빌어본다. ‘새해에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화해와 발전을 이루는 한 해가 되게 하소서!’ 덕유산 향적봉
여든 어머니께서 담근 ‘자식 사랑’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저마다 월동 준비로 분주합니다. 우리 집도 김장이 끝나야 한 해를 갈무리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김장을 그만하자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든을 넘긴 어머니는 홀로 배추를 심고, 가꾸고, 고집스럽게 김장을 이어가십니다. 어머니는 자식들과 지인들에게 김장을 나눠주고 보람을 맛보고 싶으셨던 겁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니까요. 어머니, 잘 먹겠습니다.
무서리가 내린 아침, 화려했던 잎사귀들을 떨어뜨리고 꿋꿋하게 서 있는 나무사이로 찬란한 아침 햇살이 찾아듭니다. 추운 겨울을 나기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운 나무들을 보면서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하고 움켜쥔 채 또 한 해를 보내는 제 모습을 돌아봅니다. 그들을 닮고 싶어 한동안 나무 곁에 서 있어봅니다
태풍이 지나간 후 코끝을 스치는 상쾌한 바람을 타고 청명한 하늘이 펼쳐집니다. 시골집 마당 한겻에 나무작대기로 매달아 논 빨랫줄에 빨갛게 익은 잠자리들이 눅눅해진 날개를 말리고 있습니다. 더 높은 비행을 꿈꾸며 잠시 쉬어가는 잠자리들을 보면서 슬그머니 내 젖은 마음도 빨랫줄에 널어봅니다.
이제 오려나 저제 오려나 하여없이 동구밖을 바라보는 어머니 바람이 찹니다. 들어가 게세요. 일 마치고 곧 달려갈께요...
하루 종일 비 내리던 날, 옷 젖지 않으려 바삐 가다가 문득 눈길을 붙잡는 풍경. 주르르 미끄럼 타고 내려와 풀대위에 알알이 맺힌 보석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는 이 순간, 내 마음은 세상에서 제일 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