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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5월의 신록 같은 아들에게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8. 21:58

 광릉숲 소리봉에서

신록에 이끌려 보고 또 보고 하는 것은
너를 보는 듯한 반가움 때문이야.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키에 순결한 눈망울의
열여섯 살 풋풋한 네 모습이 꼭 5월의 신록을 닮았구나.
그래서 바라만보아도 벅차고 정겹고 고마운 거란다.

 

준우야, 엄마는 지금 광릉숲길을 걷고 있어. 국립수목원 기억나지? 어릴 적 엄마 아빠와 손잡고 놀러가곤 했잖아. 수목원 입구부터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전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은 언제나 인상적이지. 지금 이곳은 신록이 한창이야. 어디를 둘러보아도 고동색 나무줄기와 화사한 연초록색 잎들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황홀하구나.

숲이 발달하는 천이단계에서 광릉숲은 가장 안정된 숲으로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극상림이라고 해.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세계적인 천연기념물인 크낙새의 둥지라는 설명도 들었지. 하지만 엄마는 그런 것보다는 눈앞에 펼쳐지는 신록의 향연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어. 특히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5월의 소리봉에서 자연 그대로의 생명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수 있었지.

앙증맞은 리본 같은 은행나무잎, 부드러운 잎새를 접은 채 자라는 참나무잎, 듬성한 가지에 이제야 갓난아기 같은 새순을 내미는 개옻나무까지……. 잎 모양도 다르고 싹이 나는 시기도 다르고 노란색에서부터 연두색, 연초록색, 환한 초록색 등 색깔도 모두 다르지만 이들은 공통점이 있었어. 새로 나는 것의 신성함이랄까. 때 묻지 않은 순결함이랄까, 거기에다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힘찬 생명력까지 가득 들어 있었지.

겨우내 푸르렀던 전나무에도 새잎이 돋고 있더구나. 짙푸른 바늘잎 위로 가지 끝마다 연초록 새잎들이 삐죽삐죽 올라오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어. 며칠 전 밤에 네 귀를 후벼주다가 코밑으로 턱밑으로 보드라운 털이 나있는 걸 보았었지. 그런데 전나무 새잎을 보면서 제법 까맣지만 아직 여린 네 수염이 생각났기 때문이야. 언젠가는 뾰족한 전나무 잎처럼 네 수염도 뻣뻣하게 자라겠지.

그래 준우야, 엄마가 이곳 소리봉에서 5월의 신록에 이끌려 보고 또 보고 하는 것은 준우 너를 보는 듯한 반가움 때문이야. 피천득 선생은 5월이 ‘방금 찬물로 세수한 스물한 살의 청신한 얼굴’이라고 비유했지만, 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키에 싱그러운 피부, 맑은 눈망울의 열여섯 살 풋풋한 네 모습이 꼭 5월의 신록을 닮은 것 같구나. 그래서 바라만보아도 벅차고 정겹고 고마운 거란다.

그런 네가 요즘 학교 시험이다, 학원 공부다 해서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것 같아 엄마는 마음이 아프단다. 지난 중간고사때 네가 다니는 중학교에서 엄마가 시험 감독을 했을 때였어. 교실에 꽉 들어찬 아이들이 마음을 졸이며 시험지를 받아들고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었지. 창밖에는 화창한 날씨에 나뭇잎들이 푸르렀어. 엄마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그랬단다. 책상 가득 시험지를 펼쳐놓고 시험을 보다가 문득 창밖을 보면 눈부시게 푸른 잎들이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학창시절이 왜 그렇게 길고도 어두운 터널 같이만 느껴졌던지…….

교실에 마흔 명쯤 되는 아이들은 제각각이었어. 머리박고 열심히 푸는 아이도 있지만 일찌감치 찍어놓고 엎드려 자는 아이도 있었지. 시험지 빈 공간에 잔뜩 그림을 그리는 아이, 쏟아지는 콧물을 훌쩍이며 연신 다리를 떠는 아이……. 생긴 모습도 하는 짓도 다르지만 저만의 개성을 가진 이 많은 아이들이 오직 공부라는 잣대로 평가받는 현실이 안타깝더구나. 그런데 준우야, 그 아이들도 너처럼 잎 모양도 빛깔도 싹이 나는 시기도 다르지만 제각각 존재로서 있는 그대로 사랑스러운 5월의 신록이라는 걸, 엄마는 이제 알 것 같아. 창밖의 나무뿐만이 아니라 콘크리트 교실 안에도 푸르른 신록들이 울창하다는 걸 말이야.

우리 아파트 단지에도 나뭇잎들이 청신한 얼굴을 하고 있구나. 이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견디고 모진 폭풍우도 이겨내면서 짙푸르고 무성해지겠지. 우리 준우도 힘든 일도 이겨내고 시련도 헤쳐가면서 한층 더 성숙해지리라고 믿어. 요즘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지만 준우야, 엄마는 네가 지금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지 알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엄마에게는 준우가 영원히 눈부신 5월의 신록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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