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본문

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8. 19:56

- 섬진강 구담마을

매화꽃 그늘아래 나물캐던 내 할머니 같은 얼굴들,
내내 따라 다니던 김치 국물 묻은 강아지,
마음 속 가득 스며들던 섬진강 물소리…….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작은 강변 마을에서 보낸 무료한 하루가
못내 그리워질 것만 같다.

 

하릴없이 강변에 앉아 있다. 무엇을 할까. 딱히 할 일도 없다. 생각을 하려해도 아무 생각이 없다. 흐르는 물소리만 끊임없이 들려온다. “돌돌돌~ 돌돌~”
같은 곡조가 반복되기도 하고 변주되기도 한다. 결코 끝나지 않는 연주이지만 질리는 법이 없다. 수면 위에는 오후의 햇살이 내려 앉아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영롱하다.

 

화창한 봄날, 나른한 햇살이 쏟아지는 섬진강변을 찾았다. 강변을 따라 빼곡하게 심어진 매화나무에는 매화꽃이 흐드러지다 못해 지기 시작한다. 발아래에는 무심한 강물이 흘러간다. 섬진강 상류를 끼고 산허리에 예닐곱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임실군 덕치면 구담마을. 이 마을은 무엇이 있어서 특별하기보다는 무엇이 없어서 특별하다. 민박이나 식당은커녕 구멍가게조차 보이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버린 마을에는 몇몇 노인들만 남아 비탈밭을 일구고 다슬기를 잡으며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마을에서 강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을 따라 매화꽃 향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길섶에는 현호색이며 개불알풀꽃 등이 있는 듯 없는 듯 피어있다. 겨울옷을 벗은 버들개지도 초록빛 봄물이 들었다.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가 점점 커진다. 마을 앞 섬진강은 강이라 하기에는 위엄도 권위도 없다. 그 흔한 시냇물처럼 친근하고 편안하다. 강을 건너는 징검다리조차 놓여있다. 넓적한 돌을 이어 만든 징검다리는 사람들이 마주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다.

 

마을에서부터 강아지 한 마리가 내내 따라온다. 귀여운 구석도 있지만 꼬질꼬질하다. 이마에는 김치 국물 같은 것도 묻어 있다. 낯선 사람에게 짖을 줄도 모른다. 그저 꼬리만 흔들어댄다. 마을 노인들과 단출하게 살던 터라 사람이 그리웠던 탓일까. 그래서 낯선 사람은 위협적인 존재도 아니고 뭔가 얻기 위한 존재도 아닌 그냥 존재로서 반가운 것일까. 잠시 그의 순수함이 부러워진다. 새로운 사람들이 오자 강아지는 익숙한 솜씨로 징검다리를 건너며 사람들을 안내한다.

 

나른한 오후 햇살아래, 매화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온다. 강변에 앉아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딱히 할 일도 없지만 이 무료함이 싫지 않다. 돌돌돌 쉼 없이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처럼 이곳에서는 시간조차 무심하게 흘러간다. 시간을 쪼개면서 아등바등하던 바쁜 일상 속에서는 하고 싶고, 가지고 싶고, 되고 싶던 욕심들이 바글거렸다. 무언가를 위해 애쓰고, 뜻대로 되지 않아 절망했던 나날들이 문득 부질없게만 느껴지는 것은 섬진강 물소리 때문일까.

 

징검다리에는 지나가던 아이들이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있다. 다슬기를 잡는 모양이다. 돌 하나를 들어내자 크고 작은 다슬기 가족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다슬기를 잡다가 이번에는 납작한 돌을 주워 물수제비를 뜬다. 어린 시절, 빨리 크고 싶은데 더디게만 흘러가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길고 긴 하루를 메우기 위해 쉼 없이 놀잇감을 찾던 기억들. ‘옛이야기 지즐대던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있는 듯 없는 듯 피어나는 길섶의 이름모를 꽃들과 바랄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는 순순한 마음들……. 어른이 되고 도시에 살면서 얻은 것 대신 잃은 것은 무엇이던가.

 

고즈넉한 강변마을, 낡고 허름한 집들, 매화꽃 그늘아래 나물캐던 내 할머니 같은 얼굴들, 내내 따라 다니던 김치 국물 묻은 강아지, 마음 속 가득 스며들던 섬진강 물 흐르는 소리들……. 빼어난 자연 풍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도 아니고, 푸짐한 먹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 정지용의 시구를 빌리자면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작은 강변 마을에서 보낸 하루가 되돌아볼수록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지 정말 모르겠다.

글. 최경애(수필가)  사진. 김선규(생명다큐 사진작가)

 

 

'삶의 원형을 찾아서 > Nature & Mind'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들이 살고 있었네  (0) 2017.07.08
5월의 신록 같은 아들에게  (0) 2017.07.08
돌담 사이 숨비소리  (0) 2017.07.08
모든 이가 소생하게 하소서  (0) 2017.07.08
한 줌 햇살의 희망  (0) 2017.07.08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