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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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돌담 사이 숨비소리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8. 19:51

- 제주 구좌읍 하도리

어차피 불어올 바람이라면
세상의 한파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리라.
찬바람 안으며 꿋꿋하게 버티리라.
한겨울 모진 추위를 견디고 꽃을 피우다
때가 되면 미련 없이 툭툭 떨어지는 저 동백꽃의 순명처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가 않다. 양지바른 곳에 얼굴을 내민 새싹을 보아도 마음속에는 쌩쌩 찬바람이 분다. 그다지 춥지 않았던 겨울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건 세상살이의 한파에 몸보다 마음이 더 추웠기 때문일까.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건 아마도 그런 봄에 대한 갈증 때문이리라.

“제주의 봄은 해녀들의 숨비소리에서 시작되지요.” 바쁜 일정을 뒤로 하고 안내를 자처한 지인은 먼저 해녀박물관으로 이끌었다. 관광객들이 별로 찾지 않는 박물관은 한적했다. “휘오이...”, “휘오이...”, 애달픈 휘파람소리가 텅 빈 영상실에서 울려 퍼졌다. 물속에서 전복이며 소라를 따면서 참았던 가쁜 숨을 한꺼번에 내쉬고 빠르게 들이키는 해녀들의 숨비소리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함께 그 숨비소리가 화면 가득 다가왔다.

어릴 때부터 물허벅을 지고, 철모르는 십대 초반에 물질을 시작했던 그녀들이었다.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물결에 시달리다, 저녁이면 돌아와 우는 아이 젖먹이며 밥을 지었다. 해녀들이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거나 해산물을 파는 해녀할머니들을 만났을 때에는 그저 억척스러운 제주아낙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온 가족의 생명줄을 등에 지고 살았을 해녀들의 그 고달픈 삶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라산에 눈이 녹으면 겨우내 잦은 풍랑과 추위로 바다에 나가지 못했던 해녀들이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한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해녀들의 숨비소리에서 봄을 먼저 느끼는 모양이었다. 마침 바다의 신인 영등할망이 제주에 내려오는 기간이라 바다에서 해녀들을 볼 수는 없었다. 이 기간에는 일하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찬바람에 출렁이는 바다를 보며 아직도 바람이 매서운데 물질을 했을 해녀들을 떠올렸다. ‘애기짐과 미역짐은 무거워도 내려놓지 않는다’던 그들의 삶의 무게 앞에서 자꾸 마음이 출렁거렸다. 
 
해녀들의 삶터는 바다뿐이 아니었다. ‘바다도 밭, 육지도 밭’이기에 때문이다. 제주 어딜 가나 이리저리 구부러지는 돌담을 따라 푸릇푸릇한 밭이 이어진다. 제주에서 돌담이 아름답다는 하도리 밭담을 걸었다. 구멍이 숭숭난 채 아무렇게나 쌓은 듯한 돌담이 아무래도 신기했다. 툭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은데 월드컵 경기장 지붕을 날려버린 태풍에도 끄떡없었다고 한다.

해안도로변에서 공사 중인 리조트의 지반이 내려앉아있는 것을 보았던 생각이 났다. 콘크리트로 만든 방파제도 파도에 금방 부서진다고 했다. 제주는 파도와 바람이 거칠어서 콘크리트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게 지인의 설명이었다. 그제야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과 바짝 엎드린 집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척박한 땅에서 모진 바람에도 견뎌내며 살아가는 제주의 삶은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뜻에 따르는 순명(順命)하는 삶이었다.

지금 세상에는 유례없이 거센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그 거센 바람 앞에서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눈을 질끈 감고 다 괜찮을 거라고 애써 부인하기도 한다. 때로는 힘으로 부딪히며 맞서다가 꺾어지고 절망하지는 않았는가. 그렇게 세상의 파도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내게 지인은 제주의 자연과 제주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바람을 그대로 맞으면서 구멍으로 통과시키기 때문에 꿋꿋하게 서있을 수 있는 그들의 존재 방식을...

세찬 바닷바람에도 꿋꿋한 돌담에서 나는 해녀들의 삶을 보았다. 누구보다도 고단한 삶을 살아냈을 그녀들이지만 그들은 고통을 피하지도 않고 맞서지도 않았다. 고통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할 때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살아가는 의미로 다가온다는 삶의 철학을 그들은 제주의 자연에서 배웠던 것일까. 어디선가 까만 돌담사이로 숨비소리가 들려왔다. 봄을 알리는 애달픈 숨비소리가…….

 

찾아가는 길
제주의 바깥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12번 국도에서는 제주의 자연풍광이 그대로 드러난다. 제주시에서 조천, 구좌, 성산 등으로 이어지는 동회선 일주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하도리에 있는 해녀박물관과 하도리 밭담 등이 나온다. 제주의 숨겨진 자연과 역사를 만나려면 제주생태관광 전문 뭉치여행사 (TEL: 080-749-6886, O64-724-6887)에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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