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바다로 가는 자전거 본문

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바다로 가는 자전거

빛으로 그린 세상 2017.07.07 15:01

-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배는 군산항을 떠나면서도 오랫동안 군산의 공장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망망대해. 안개는 바다를 신비롭게 만들었다. 흩날리는 안개와 짭짤한 바람에 온몸을 적시며 문득 나는 지금 어느 세계로 가고 있는 걸까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얼마쯤을 그렇게 달리자 뿌연 안개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섬들의 나라였다. 온몸을 바닷바람에 흠뻑 적시고 마음도 바닷물로 씻어야 들어갈 수 있는 섬들의 나라…….

고군산군도의 맏형 뻘 되는 선유도에 내리면서 나는 동화의 나라라도 들어온 듯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맨 처음, 비릿한 바다냄새가 온 몸 가득 빨려 들어왔다. 냄새만 맡고도 밥 한 그릇 먹겠다는 농담이 오갔다. 햇살과 바람이 켜켜이 쌓인 그을린 얼굴에서도 바다냄새가 짙게 묻어있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선 횟집을 지나 드넓게 펼쳐진 해수욕장을 끼고 가는 동안 손님을 마중 나온 민박집 봉고차 몇 대만 있을 뿐, 좁은 도로에는 자동차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자동차 대신 자전거가 달리는 나라였다.

민박집 아주머니가 자전거를 내주셨다. 이걸 타고 한 바퀴 돌라고. 대략 난감했다. 자전거를 타본지가 언제던가. 어릴 적 오빠에게서 자전거를 배웠었다. 친구랑 같이 배웠는데 오빠는 내가 못 탄다고 친구만 잡아주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정말 신기하게도 금방 배우고 잘 달렸고, 운동신경도 둔하고 균형감각도 없는 나는 끝내 포기했었던가. 그 후 아이들 키우면서 자전거를 가르칠 때 남편이 잡아줘서 앞으로만 겨우 조금 갈뿐, 자전거는 내게 잘 하지 못해서 피하고 싶은 오랜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일행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그냥 뒤따라 걸어가거나 뛰어가지 않으려면 자전거를 타야했다. 얼떨결에 자전거를 받아들고 좋은 길이 나올 때까지 끌고 걸어갔다. 활처럼 휘어져 길게 이어진 해변에는 갯벌과 모래사장이 드러났다. 코발트빛으로 출렁이는 바다와 드넓은 백사장도, 길가에 핀 해당화나 우뚝 솟아있는 망주봉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가야할 길만 숙제처럼 보였다. 삐뚤빼뚤 가다가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이 나오면 무조건 내려서 걷고,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지나가도 멈추어 섰다.

길게 이어진 선유도 해변을 따라가면 이웃섬 장자도에 연결되는 장자대교가 나온다. 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다리이지만 아래에서 본 모습은 우람하기만 하다. 언덕을 끌고 올라가 자전거를 타고 장자대교를 건너는데 양 옆으로 시퍼런 바다가 출렁인다. 조금만 핸들을 잘못 돌리면 빠질 것만 같은 두려움에 가슴이 쏴해진다. 놀이동산에서 바이킹타고 내려올 때 느낌이 이랬던가. 간이 콩알만 해져서 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 즐거워 보이고 잘만 간다. 장자도를 지나 바닷냄새가 가득한 대장도를 어떻게 다시 돌아서 장자대교를 넘어왔는지 모르겠다. 다만 장자도에서 바라본 대장도의 일몰은 아름다웠다. 조그만 섬들 사이로 고기잡이배가 보이고 해가 지는 모습의 평화로움이란…….

엉덩이가 아파올 때쯤 조금씩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자전거 옆으로 비껴 달리기도 하고 바람을 가르며 내리막길을 달리는 기분도 짜릿했다. 두려움과 주저함과 염려를 내려놓고 마음껏 달리면서 느끼는 자유로움은 황홀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작은 일에도 두려워하고 염려했던가.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잘 할 자신이 없다고 못박아놓고 해 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가. 잘 할 자신이 없으면 미리 포기하고 꼭꼭 숨겨두었던 내 열등감의 비밀 주머니 속에 있던 수많은 목록들, 나는 오늘 그 주머니 속에서 하나를 꺼내어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잘하지는 못해도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도 된다고 자전거를 배우던 어린 나에게 속삭인다. 넌 할 수 있다고.

모래가 촘촘한 갯벌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바닷가로 내려와 걷다가 모랫바닥 한가득 펼쳐진 그림에 깜짝 놀랐다. 잭슨 폴락의 추상화 같기도 하고 원시 동굴 벽화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외계인들의 암호 같기도 한 그 거대한 그림은 수많은 고둥들이 그려낸 삶의 궤적들이었다. 하나하나는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그들이 함께 어우러져 보여주는 거대한 그림은 조화이고 아름다움이었다. 결국 우리 네 인생도 이럴진대, 잘하려고 기를 쓰고, 못한다고 절망했던 마음들은 모두 욕심일 뿐, 있는 그대로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인 것을…….

어스름 저녁 길, 자전거를 타고 숙소를 향해 달리는 마음에는 두려움과 자유로움이 뒤섞여있다. 급커브 내리막길에는 다시 두려움이 엄습한다. 자전거를 끌고 가며 바닷물이 밀려드는 모래사장을 바라본다. 지금도 고둥은 아주 느릿하게 제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찾아가는 길
신선이 노닐던 섬, 선유도로 가려면 군산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십분 정도 가야한다. 군산여객터미널로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군산나들목을 나와 706번 지방도로에서 좌회전하여 27번 국도를 타고 가다 이정표를 따라 군산 여객선 터미널로 가면 된다. 자세한 내용은 군산여객터미널(063-442-0116) 밀파소민박(063-466-6024)에 문의하면 된다.

'삶의 원형을 찾아서 > Nature & Mind'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대, 태안으로 가려거든  (0) 2017.07.07
봉미, 그 품에 안기다  (0) 2017.07.07
바다로 가는 자전거  (0) 2017.07.07
동강의 새가 되어  (0) 2017.07.07
너도 ‘바람꽃’이야  (0) 2017.07.07
봄을 듣다  (0) 2017.07.07
0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