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너도 ‘바람꽃’이야 본문

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너도 ‘바람꽃’이야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7. 14:51

- 경기도 남양주군 천마산

 

“누구 찾아요?”
“노루귀?”
몸을 잔뜩 숙이고 땅만 바라보는 내게 지나가는 등산객이 물었다. 뜬금없이 누구 찾느냐는 물음에 살풋 웃음이 배어났다. 이곳에 자주 오는 등산객들에게는 노루귀가 산 속에 사는 친구쯤 되는 모양이다. 이른 봄에 피는 야생화를 찾아 천마산에 오르는 길이었다. 겨우내 언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야생화들이 활짝 반겨줄 건만 같았던 산자락에는 마른 낙엽들만 뒹굴었다.  

산은 그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화사한 봄빛 대신 회갈색의 암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회색 도화지에 노란 물감을 흩뿌린 듯 생강나무 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나뭇가지에는 좁쌀만 한  잎새들이 촘촘히 돋아나고, 발아래에는 푸릇푸릇한 싹들이 땅위로 솟아났다. 솔잎도 더욱 새파랬다. 산은 서서히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봄의 숨결을 가슴 속 깊이 들이마시며, 땅 속에서 그리고 나무줄기 속에서부터 봄기운을 차곡차곡 채워가고 있었다.

산 속에서 보물이라도 찾는 심정으로 몸을 좀 더 낮추고 들여다보았다. 그때, 쌓인 낙엽 사이로 한 떨기 너도바람꽃이 눈에 들어왔다. 도감에서 본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훨씬 작은 것에 놀랐다. 손가락만한 키에 고개까지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땅에 바짝 대지 않으면 꽃 모양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가녀린 줄기 위에 순결한 하얀 꽃을 달고 있는 너도바람꽃의 청초한 모습에 그만 마음이 애잔해졌다.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너도바람꽃에 유독 마음이 머무는 까닭은 무엇일까. 도시에서는 화려한 벚꽃이며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지나가는 이의 눈길을 붙잡는 데, 천마산 양지바른 산자락에 사는 봄꽃들은 남의 눈의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피어난다. 담벼락이나 개천가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개나리꽃들이 저 멀리서도 제 아름다움을 봐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은데, 이곳의 꽃들은 가장 몸을 낮추고 가장 땅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야 비로소 순결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환한 햇살에 눈부신 신록과 크고 화려한 꽃들의 유혹, 때마침 선거철이라 거리의 확성기 소리까지 어우러져 한창 무르익는 도시의 봄은 온통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이와는 달리, 아직 겨울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은 산속에서 이곳의 풀꽃들은 누구보다 먼저 부지런히 꽃을 피운다. 하도 작아서 저보다 큰 풀이나 나무가 무성해지면 햇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눈 속에서도 애달픈 줄기를 내밀고 찬바람에 맞서며 꽃봉오리를 부풀렸을 너도바람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자신만의 향기와 빛깔로 피어나고 있었다.

만일 내가 꽃이라면 어떤 꽃일까. 다른 크고 화려한 꽃을 부러워하면서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시들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안에 무슨 꽃이 들어있는 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내 꽃을 피우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찬란한 꽃과 비교하면서 절망하고 좌절하지는 않았던가. ‘미나리아제비과 너도바람꽃, 꽃은 3~4월에 피며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받침으로 꽃잎은 작아서 수술처럼 보인다. 높은 산에서 자라므로 꽃이 조금 늦게 핀다’라는 도감의 내용보다도, 산 속에서 만난 너도바람꽃은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다만 자기 자신으로 피어나서 최선을 다해 머물다 가는 삶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런 삶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마음을 열고 주위를 둘러보자, 처음에는 잘 눈에 띄지 않던 너도바람꽃들이 여기 저기 피어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낙엽더미에서는 잎 모양이 노루의 귀를 닮았다는 노루귀도 두 개 또는 세 개씩 짝지어 흰색 보라색의 앙증맞은 꽃들을 피어 올렸다. 땅위로 수도 없이 올라 온 복수초 꽃망울들도 따스한 햇살에 노란 꽃잎을 벙그렸다. 꽃이 진 다음에는 돌돌말린 잎이 솟아올라 부채처럼 퍼지는 앉은부채, 수줍은 산골 처녀 같은 얼레지, 이름도 모양도 독특한 처녀 치마, 연보랏빛 현호색 군락 등등……. 이른 봄, 텅 빈 줄 알았던 산에는 마른 낙엽 사이나 돌 틈 또는 나무 밑동에서 작은 풀꽃들이 군락을 이루며 온 산자락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어디 발 둘 데가 없을 정도로 이곳저곳에서 올라오는 천마산의 봄꽃처럼, 이 세상 어딘 가에도 욕심을 버리고 자기 빛깔로 살아가는 눈 맑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을까. 자기를 과시하지도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오순도순 모여 사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을까.  어수선한 세상이다. 목청을 돋우면서 서로 잘났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깎아 내리려는 세상이다. 지위나 재산이나 학력을 과시하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움츠려들고 기죽어 살아가는가. 하지만 우리가 미처 모를 뿐, 순결한 영혼을 가진 바람꽃을 닮은 민초들이 이 땅의 곳곳에서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찾아가는 길

봄 야생화를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생태계의 보고인 천마산 군립공원은 들머리가 여러 군데이고 코스도 다양하다. 서울에서 가장 인접한 들머리는 호평동이며 코스도 가장 짧다. 경기도 구리시를 지나 금곡, 평내를 지나 마치터널 전에 호평동으로 좌회전한 다음 호만마을로 진입하면 주차장이 나온다. 좀 더 올라가면 '천마산군립공원' 입구이다.
천마산군립공원 관리사무소 (031-590-2733)


 

'삶의 원형을 찾아서 > Nature & Mind'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대, 태안으로 가려거든  (0) 2017.07.07
봉미, 그 품에 안기다  (0) 2017.07.07
바다로 가는 자전거  (0) 2017.07.07
동강의 새가 되어  (0) 2017.07.07
봄을 듣다  (0) 2017.07.0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