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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 다락밭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6. 22. 15:53

 

굶주림에 지친 북한이 ‘벌거숭이 공화국’으로 급속히 전락하고 있었다. 북한 당국이 ‘주체농법’이란 미명아래 옥수수, 감자 등을 심기 위해 ‘다락밭’을 개간하면서 북녘땅 전역에 걸쳐 산불을 내는 것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족한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수입하기 위해 백두산은 물론 두만강, 압록강변의 수십년생 아름드리 원시림을 대대적으로 남벌하고 있었다. 남양, 삼봉, 회령, 무산, 삼장, 혜산 등 무역거점에서 하이관(海館)다리를 통해 중국쪽으로 넘어오는 목재운반 트럭만해도 하루 평균 30∼40대씩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취재팀이 두만강 최하류인 팡촨(防川)을 출발해 백두산을 거쳐 압록강 최하류인 단둥(丹東)까지 3천리를 종주하는 동안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천4백여㎞에 이르는 북한∼중국 접경지대의 북녘 산야는 바위산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90% 이상이 산불로 ‘검둥산’이 돼 버렸다. 이들 가운데 약 70%는 누더기 헝겊을 얼기설기 기운 것처럼 보이는 ‘다락밭’으로 이미 개간됐거나 개간중이었다.

아직 개간되지 않은 채 방치돼있는 나머지 산에는 숯덩이로 변한 나무들 사이사이로 파릇파릇한 산나물과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양지바른 능선 곳곳에서는 허름한 옷차림의 북한 주민들이 배낭을 둘러멘 채 산나물을 캐는 모습이 목격됐다.

그동안 회령 일부지역에서 큰 불이 간단없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1주간 지속된 이 불이 바람을 타고 중국쪽으로 번지는 바람에 수㎞에 달하는 인근 산들도 잿더미로 변했다. 이 때문에 중국 당국에서 북한측에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근지역에 사는 농부, 북한을 자주 왕래하는 보따리 장수, 트럭운전사들에 따르면 이같은 불은 결코 접경지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북한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전했다.

충산(崇善) 인근의 한 조선족 농부는 “북한이 집단농장제만을 통해서는 곡물 생산량을 늘릴수 없다고 판단, 최근들어 ‘분조도급제’를 도입하면서 火田(화전) 개간이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같다”고 말했다. 분조도급제란 2∼3가구를 한 생산단위로 묶어 화전개간을 통해 새 땅을 일구면 이들 개개인의 분배몫을 크게 늘려주는 일종의 인센티브제.

이 때문인지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상대적으로 살기가 괜찮은 것으로 알려진 두만강지역의 무산, 회령, 남양 등과 압록강지역의 혜산, 만포, 신의주 등 변경도시 인근의 산들도 여지없이 벌거숭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회령, 삼장, 혜산 인근의 산에서는 불을 지르고 있는 현장이 몇 차례 목격되기도 했다.

북한을 드나들며 보따리장사를 하는 조선족 여인 김모(46)씨는 “불과 2∼3년전만 하더라도 북한쪽의 삼림이 중국쪽보다 훨씬 더 무성하고 푸르렀다”고 말했다. 그녀는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규모 방화가 계속되면서 아름다운 북녘산야가 온통 ‘죽음의 땅’으로 변하는 것을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싼허(三合)인근에 사는 농부 강모(32)씨는 “재작년부터 간간이 불이 나기 시작해 올해초부터는 대대적으로 확산됐다”면서 “특히 지난 4월에 들어서는 거의 매일 불이 났다가 비가 내리면 저절로 꺼지는 일이 반복됐다”고 전했다.

그는 “이 기간중 산불을 내면 고사리, 냉이, 달래 등 산나물이 보름이상이나 앞당겨 자라나 주민들이 입에 풀칠이나마 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산나물 채취를 끝내면 경사도 80%가 넘는 산 정상까지 화전을 일구고 있다”고 말했다.

두만강변 난핑(南平)에 사는 30대 후반의 한 농부는 “강 맞은편 마을의 경우 도시나 농촌에서 추방된 주민들이 지난해부터 대거 몰려와 마을을 형성, 산을 불태운 후 3∼4㎞에 달하는 다락밭을 일구었다”면서 “이 과정에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다”고 말했다.

하루 한번꼴로 북한을 다녀오는 한족 트럭운전사 왕모(28)씨는 “밀가루를 싣고 갔다가 백두산 인근 갑산지역에서 주로 통나무를 실어왔는데 접경지역은 물론 내륙지역에서도 화전개간은 끊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뒤늦기는 했지만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식량지원을 약속한 후부터는 대규모 벌채가 일시 중단돼 이미 벌채된 목재들만 실어나르고 있는 중”이라며 “그러나 벌채가 언제 또 다시 재개될지는 모른다”고 덧붙였다.

압록강변 창바이쉬안(長白縣)의 한 조선족 농부(55)는 “북한의 대규모 화전개간과 남벌은 하루살이를 위한 분신 자살행위와 같다”면서 “장마철에 접어들면 북한 곳곳에서 또다시 대규모 산사태가 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특히 쌀 밀가루 옥수수 등 외부의 곡물지원으로 급한 불을 끌 수 있을지는 몰라도 북한당국이 결함투성이인 ‘주체농법’을 포기하지 않는 한 식량난의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중국 창바이쉬안=특별취재반>  <문화일보 1997년 6월 10일>


후기: 이 보도가 나간후 북한의 산림지원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 졌고 이는 '평화의 숲' 출범으로 이어졌다. 필자도 평화의 숲 창간 발기인으로 참가, 현재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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