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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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고향산책

해안 절벽에 걸린 마을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18. 15:55

경남 남해군 남면 가천마을

 

한반도 남쪽 끝자락은 벌써 봄이 한창이다. 양지바른 논두렁에서 아낙들이 아기 손만큼 올라온 냉이를 캐고 있다. 봄볕이 고루 퍼진 들녘에는 시금치와 마늘 등 풋것들이 이미 움을 틔우고 있다. 질긴 겨울의 꼬리를 자르고 봄이 한껏 기지개를 피는 남녘의 해안 구석구석은 그야말로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남해를 육지와 연결하는 남해대교를 지나 남쪽으로 갈수록 봄빛은 더욱 파래진다. 풋내가 가득한 봄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섬 끝 벼랑 구빗길, 그아래로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그림 같은 다도해를 품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다 문득 아래를 굽어보면 벼랑에 마을이 하나 걸려 있다. 남해군 남면 가천 마을이다. 바닷가 산비탈에 붙은 동네가 마치 절벽에 붙은 제비집 같다. 파도가 바로 들이칠 것 같은 절벽 위부터 한 계단씩 올라가는 층층 다랑이 논밭이 산중턱까지 100 여층, 그 틈틈이 작은 집들이 움을 파고 들어서 있다. 논밭이 하도 작아 트랙터로는 농사지을 엄두도 못내고 소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곳. 오랜만에 밭 갈러 나온 소가 늙은 농부의 호령에도 아랑곳없이 딴청이다.

″아따, 이 동네 좀 보소. 여기도 사람이 사는가 봅네.″

″우얄라꼬 이런 곳에 터를 잡았는기요. 바닷가 산비탈도 명당인기요.″

남해 해안도로를 따라 봄 마중 나온 상춘객들이 가천마을을 보고는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망망대해와 맞닿아 있는 가천 마을은 거센 파도와 암반으로 둘러싸여 조각배 한 척 대기 힘든, 남해에서 선착장이 없는 유일한 갯마을이다. 그래서 이곳에 삶의 뿌리를 내린 주민들은 바다로 내리지르는 소울산과 응봉산 비탈을 깎고 주먹돌을 쌓아 계단을 만들어 조각밭을 일궜다. 바다부터 산중턱까지 층층이 놓인 다랑이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위 남해사람의 '깡치정신'을 엿볼 수 있다. 깡치란 평지가 많지 않은 남해사람들이 불가능할 것 같은 산비탈 절벽에 돌담을 쌓아 논과 밭을 일군데서 나온 말이다. 그 깡치정신이 가천마을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대를 한번 보이소, 마, 깡이 안세면 살 수 없는 기라.″

지게에 마늘을 한 짐 지고 좁은 골목길을 내려가던 한 주민의 말이다. 가천 마을 다랑이 논과 밭은 또한 이곳 주민들의 슬기와 집념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위에서 물을 대야 고루 물을 댈 수 있게 수로가 각 논으로 연결되었고 한 뼘이라도 더 땅을 넓히기 위해 축대는 어느것 하나 안으로 기운 것 없이 바짝 곧추서 있다. 돌축을 따라 유연한 곡선으로 만들어진 논 모양새가 다양하다. 삿갓을 씌우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논이라 하여 삿갓배미라 부르는 달갱이 논부터 봇물이 실한 세마지기 가웃 논도 있다.

마을 끝에 우뚝 서있는 가천 암수바위에서 더 내려가면 벼랑이다. 벼랑과 맞닿은 다랑이 논배미에 서니 오랜 세월을 대물림하며 살았던 가천 주민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피부로 느껴진다.

″다랑이 논은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예술로 승화된 겁니다.″

″앞으로는 망망한 바다고 뒤로는 높은 산이 막혀 있어 절벽 같은 산을 개간하여 다랑이 논을 만들었지요.″

오랜 객지 생활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와 청년회장을 맡고 있는 김성욱(53)씨의 설명이다. 호기심어린 눈으로 가천 마을을 바라보던 관광객들의 표정이 이내 감동의 눈빛으로 바뀐다. 가천 마을의 바다와 산비탈에 가득한 봄빛이 여행객들의 얼굴에도 옮겨온 듯. 어느덧 마을을 나서며 나그네 또한 마음에 푸른 싹 하나를 틔우고 돌아가는 봄길 여행이었다.

PS) 환경부는 지난해 2월 6일 한려수도의 청정해역에 촘촘한 계단식 논밭이 해안 절벽과 어우러진 가천마을을 자연생태 보존 우수마을로 선정하였다.

<찾아가는 길>
한반도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남해도를 찾아가는 길은 머나먼 여정이다. 하지만 작년에 대전과 진주를 잇는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한결 가까워졌다. 진주에서 남해고속도로 광주 방향으로 들어가서 곤양IC를 나와 진교 교차로-1002번 지방도-노량교차로를 이용한 후 남해대교를 건너면 남해도로 들어설 수 있다. 남해에 들어서 1024번 지방도를 타고 서쪽해안을 이용해 끝까지 가면 남쪽 해안에 붙은 가천마을이 나온다. 마을에 관한 자세한 안내는 권정도이장(055-862-8182)에게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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