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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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숲, 아이들과 친구 되다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18. 09:17

- 경기 양평 유명산 숲학교

 

풀이름, 나무 이름 하나 제대로 외운 게 없습니다. 생강나무의 매콤한 맛과 물씬한 흙냄새와 새로 나는 전나무 잎의 보들보들한 감촉만이 생생할 뿐……. 나뭇잎을 훑으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들려오는 숲의 품에서 그저 편안하고 즐거웠던 기억만 가득 남아 있을 뿐이지요.

#숲으로 들어가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야말로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봄의 신록이 연두색이라면 6월의 신록은 어떤 색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부드러우면서도 풋풋하고 선명하면서도 싱그러운 초록빛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 푸름 속에서 청량한 물소리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계곡 가에서 아이들이 제법 익숙한 솜씨로 물수제비를 뜨기도 하고 물속의 바위를 들추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도 합니다. 잠시라도 틈이 나면 끊임없이 놀이를 찾는 아이들과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부모들이 있는 곳, 이곳은 숲 전체가 교실이고 놀이터인 유명산 숲학교입니다.

“여러분, 잘 주무셨어요? 이제부터 숲을 산책하면서 숲 속의 친구들을 만날 거예요.” 주변에 모인 아이들과 부모들이 유명산 숲학교 선생님인 손영란 숲해설가를 따라 숲으로 들어갑니다. 이들은 김포시 중봉청소년수련관에서 마련한 ‘가족 숲체험캠프’에 단체로 참가한 가족들입니다. 신선한 아침 공기에 숲 향기가 실려 오고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비칩니다. 신록이 펼쳐지는 숲길을 한가로이 걸으며 모두들 넉넉한 마음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 뒤를 따라가며 설명에 귀 기울이지만 조금 큰 남자아이들은 맨 뒤에서 서로 어울려 다니며 딴 짓입니다. 전날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은 벌써 친구가 된 모양입니다.

#숲에서 놀다
“여러분, 땅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보세요. 잎이 몇 개이지요?” “다섯 개요” “끝이 뾰족한
이파리가 다섯 개인 것은 잣나무 잎이고 두 개인 것은 소나무 잎이에요.” 그리고 보니 주변의 아름드리나무들이 소나무인 줄 알았더니 모두 잣나무였습니다.
선생님이 보여주는 큰 솔방울처럼 생긴 잣 열매도 아이들은 마냥 신기합니다. 다람쥐가 잣 열매를 두 발로 잡고 돌려서 따는 이야기, 겨울 동안 먹으려고 다람쥐들이 열매를 땅 속에 숨겨놓고는 깜빡 잊어버려 싹이 트는 이야기가 구수하게 이어집니다. “이제부터 모종삽으로 땅을 파보세요.” 흙 속에 잣 싹이 트는 모습도 보이고 잣나무 뿌리도 만져집니다. 무엇보다도 땅을 파면서 물씬 풍겨오는 흙냄새와 축축하고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수많은 생명을 품는 원초적인 신비스러움이라고나 할까요. 아이들은 마음껏 흙을 파고 만지며 신이 났습니다.

길은 계속 이어집니다. 어떤 나무의 가지 끝을 조금 잘라 씹어보니 생강 맛이 납니다. 이른 봄이면 노란 구름 같은 작은 꽃을 피워내는 생강나무입니다. “여러분, 가시가 있는 나무는 먹을 수 있다고 했지요?” 선생님이 나눠주는 찔레잎을 먹고 4학년 상혁이 표정이 묘합니다. “맛이 없어요, 그런데 쓰지도 않고 향기가 좋아요.” 추어탕에 넣어 먹는 산초 잎도 먹어보았습니다. 쌉싸래하면서도 독특한 향이 인상적입니다. 개울가에 도룡뇽알도 조심스레 꺼내서 만져봅니다.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가는 친구들도 있지만 뭉클뭉클한 젤리 같은 알주머니를 사랑스럽게 만지는 아이도 있습니다. 

#숲을 맛보고 만지고 느끼다
“나뭇잎마다 다른 냄새가 나요.” 4학년 김동연은 선생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눈을 반짝이는 아이입니다. 그리고 숲길을 걷는 내내 나뭇잎을 따서 코에 올려놓은 다음, 눈을 감고 냄새를 맡습니다. 잎마다 서로 다른 냄새를 구분하는 동연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숲을 느끼는 듯 보입니다. 서로 장난을 치느라 정신이 없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6학년 남자 아이들이 나무 막대기로 칼싸움을 하고 용 얼굴처럼 생긴 나뭇가지를 주워서 마주 바라보며 으르렁거립니다. 뛰어 다니고 낄낄거리는 아이들은 또 그들의 방식으로 숲을 만나고 숲의 품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숲길 산책을 끝내고 만들기 시간입니다. 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서 평상에 앉아 아이들이 대나무 물총을 만드느라 열심입니다. 엄마들은 압화(눌러서 말린 꽃)로 아기자기한 열쇠고리를 만들고 아빠들은 나무토막으로 동물 모양을 낸 목걸이를 만듭니다. “제가 어렸을 때 대나무 물총을 만들어서 놀았어요. 직접 만든 작살 총으로 물고기도 잡고 그랬지요.” 6학년 수연이를 데리고 온 아빠 오병택씨는 학교 가랴 학원 가랴 바쁜 요즘 아이들이 못내 안쓰럽습니다. 이어지는 편지 쓰는 시간, “아빠, 이런 데 데려와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10살 유진이가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또박또박 써내려갑니다. 딸을 지켜보는 김영주씨의 얼굴에 행복이 번집니다.

#숲의 품에 안기다
“아이들이 숲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보람이 있지요. 처음 올 때랑 프로그램이 다  끝나고 집에 갈 때랑 아이들 표정이 정말 달라져요.” 손영란 선생님은 유명산 숲학교 본부장으로 8년차 베테랑 숲해설가입니다. “아이들이 숲에서 무얼 배우기보다는 숲을 있는 그대로 느꼈으면 좋겠어요. 숲에서 먹어 보고 만져 보고 냄새 맡고 그렇게 오감을 통해서 숲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지요.” 생각해보니 나무 이름 하나 제대로 외운 게 없습니다. 생강나무의 매콤한 맛과 흙의 진한 향기와 새로 나는 전나무 잎의 보들보들한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고, 나뭇잎을 훑으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들려오는 숲의 품에서 편안하고 즐거웠던 기억만 가득할 뿐이지요.

처음 만났던 계곡 가에서 대나무 물총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덩치가 큰 남자아이들이 단연 우세해지자 이번에는 어린 아이와 여자 친구들의 아빠가 전면에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도와주는 입장이었지만 장난기가 살아난 아빠들이 남자 아이들과 한바탕 총싸움을 벌입니다. 물총을 쏘는 사람도 물세례를 받는 사람도 그것을 보는 사람도 모두 웃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한창 말썽꾸러기 사춘기인 아이들의 얼굴이 요즘 신록 같이 풋풋하고 싱그럽다는 걸 느낍니다. 숲에 한결 가까워진 아이들의 웃음 소리와 아이들을 닮은 물소리가 오래도록 울려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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