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자료실 (137)
빛으로 그린 세상
시험을 망쳤다. 내가 자신 있어 하던 사회 과목이었지만, 답은 신기하게 내가 찍은 선택지만 빗겨 나갔다. 평소에도 시험을 망친 적은 꽤 있었지만, 그때는 친구들과 웃어 넘기고 금새 극복하던 나였지만, 유달리 공부를 열심히 했고 자신 있었던 사회 과목을 망치니 몹시 속상했다. 학교에서 채점을 하면서 시험지를 찢어버렸다. 아직 남은 시험을 위해 도서관을 가자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무작정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얼마 전 열심히 공들여 제출한 환경 독후감 결과 발표가 남아 있어서, 꿀꿀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내심 기대하며 나는 컴퓨터를 켰다. 수상자 명단을 찾아보고 다시 찾아봐도 내 이름 석자는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쿵 하고 가라앉았다. 이 또한 역시 평소 같았으면 “에잉, 다음에 도전하지 뭐” 라며 쿨하게 ..
준우야 시험 공부하느라 무척 바쁘지. 그 바쁜 와중에도 아빠와 하는 사진산책이 너에게 활력을 주는 것 같아 무척 기쁘단다. 물론 준우와 함께하는 사진산책이 아빠의 삶속에도 쉼표를 주고 있단다. 아빠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느꼈겠지만 사진과 산책은 참으로 많이 닮은 것 같아. 산책에서 즐거움과 사진의 즐거움이 같은 점이 많거든 너에게 사진을 가르켜 주면서 아빠의 첫째 원칙은 ‘사진찍기는 즐거운 놀이’라는 것이지. 준우가 어렸을 때 아빠 카메라를 가지고 아빠 흉내를 내며 놀 때의 그 즐거운 마음을 잃지 않게. 아빠가 처음 사진을 배울 때에는 너무 교과서적으로 원칙을 쫒다 보니 정작 사진이 주는 즐거움과 재미를 잃어버린 곤 했지. 노출, 조리개, 셔터스피드, 피사계심도등등 이런 복잡한 사진촬영 형식들은 다 내려..
나는 산책을 하면서 멋있는 나무가 보이거나, 예쁜 꽃들, 간혹 처음 보는 것들과 조우하면 습관적으로 셔터를 눌러 사진으로 간직하고, 그 행위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데에 그쳤다. 이번 산책에도 어김없이 반사적으로 셔터로 손가락을 옮길 뿐, 내가 무엇을 찍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아했다. 나는 그저 아빠가 찍었던 정말 예쁜 꽃들과 멋진 자연의 풍경을 아빠 못지 않게 찍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그저 ‘웅장한 나무’, ‘예쁜 꽃’을 찍는 행위를 반복한 다는 것을 눈치를 채셨는지, 아빠가 갑자기 꽃과 나무들을 손가락으로 가르키시며 그들의 이름을 물어보셨다. 하지만 나는 아는 것이 없어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름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
금요일 저녁, 내일이면 주말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신나서인지, 흥분해서 축구를 하다가 바지가 터졌다. 교복 바지 엉덩이 부분이 크게 열렸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신나게 축구를 했다. 땀에 흠뻑 젖었는데, 이상하게 아랫도리가 시원해서 나중에 알아차렸지만 이미 많은 친구들이 그 모습을 봤을 생각을 하니 너무 민망했다. 후드를 벗어서 허리에 감싸고 바지의 터진 부분을 가려서 위기는 모면했지만, 민망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토요일에 책을 읽는데도 계속 그 전날의 일이 생각나서 집중이 잘 안 되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서, 나는 모처럼 카메라를 집어 들고 밤에 사진 산책을 나갔다. 산책은 밤에도 많이 나가보았지만, 카메라를 들고 나간 적은 처음이었다. 인공 조명이 호수공원을 환히 비추고 있었고, 많은 사..
언젠가 잡지에서 서울 한복판에 자동차들이 지나가면서 그 불빛들이 남긴 궤적이 만들어낸 멋진 사진을 본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나도 그런 멋진 ‘궤적 사진’을 찍어보고 싶어서 밤에 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캄캄한 밤인데도 라이트를 켜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쌩쌩 지나가는 자전거 불빛이 남기고 가는 그 궤적들을 사진으로 담아 내면 정말 멋진 사진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사진을 찍기 위해서 ‘조리개를 열어 놓는다’ 까지 밖에 몰랐던 나는 내가 원하던 캄캄한 호수공원의 야경 안에 빛의 궤적들이 그린 멋진 그림을 얻지는 못했다. 자전거가 너무 빨리 지나간 탓인가? 아니면 불빛이 너무 약해서 그런가? 다양한 의문점이 들었고 혼자서 해결해 보려고 이리저리 다른 시도를 해봤..
준우야 아빠가 지난봄에 선물한 카메라(니콘 D3100) 맘에 드니? 비싼 카메라는 아니지만 사진을 시작하는 너에게 좋은 동반자가 될 거야. 아빠가 사진을 처음 접한 이후 직업으로 20여년을 지내는 동안 많은 카메라를 사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좋은 카메라는 정을 가장 많이 나눈 카메라(니콘 FM2)였던 것 같아. 물론 지금 쓰고 있는 최첨단 디지털 카메라에는 성능과 편리함에서 비교할 수 가 없지만 오랜 세월 함께 하면서 손때가 묻은 당시의 필름카메라가 아직도 제일 좋은 카메라로 기억돼. 물론 그 카메라와 함께 ‘가평상공의 UFO출현’ ‘목숨 건 도강’등 전국을 들썩일 정도의 특종도 많이 했지. ^ ^ 아빠가 처음 사진기를 접한 건 아빠의 아버지 카메라였어. 교사이셨던 할아버지는 성격이 꼼꼼한 분이시라 카메라를..
밤새 배가 아파서 설사를 하며 잠을 뒤척였다. 전날 밤에 먹은 치킨이 뱃속에서 부활해서 뛰어다니며 콕콕 찌르는 것 같이 아팠다. 새벽에 눈을 뜬 후 바람을 쐬러 베란다로 나갔다. 창밖을 바라보니 환상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뽀얀 안개가 바닥에 깔려서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멋진 풍경 사진들 중에서 안개가 껴있는 풍경은 훨씬 멋지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이 찬스다. 배가 아팠지만, 멋진 사진을 위해서 이정도 복통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당장 옷을 갈아입고, 카메라를 챙긴 후 아빠를 흔들어 깨웠다. 잠이 덜 깬 아빠와 호수공원에 도착하였다. 안개가 낀 모습이 적나라게 드러나는 아파트 위에서 바라보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지만, 안개 속에서 ..
평소 길을 걷다가 발목이 간질거려서 내려다 보면 조그마한 풀들과 꽃들이 그 범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겨우 내 발목까지 밖에 미치지 않는 풀들이나 꽃들을 별로 심중하게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어라, 못 보던 풀이네”, “예쁜 꽃이네”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았었다. 가끔 귀엽거나, 사연이 있는 것 같은 꽃을 보면 사진으로 담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연신 고개를 떨구고, 허리를 굽혀도 사진은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에잉, 한낱 조그마한 꽃 따위. 원래 별로인데 사진으로 담으려 해도 오죽하겠어” 라며 포기를 해버렸다. 오늘도 산책을 하던 중 어김없이 귀여운 꽃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어차피 사진으로 담아도 예쁘게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아빠가 갑자기 “그..
“무조건 다 나오게, 무조건 넓게…” 나는 사진을 찍기 시작할 때부터 무조건 넓게 보고 사진을 찍는 습관이 있었다. 욕심을 부리면서 더 많은 것을 한가지 사진에다가 담으려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무조건 다양한 색이 나오고, 많은 사물들이 나와야 예쁜 사진이다’라는 생각이 머리 한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원래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보는 성격 탓일까? 항상 시험공부 할 때도 보면 나는 큰 그림을 보고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 공부를 하곤 했다. 책을 펼치고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쭈우욱 훑고 큰 틀을 이해한 후 “공부 다했다!”고 외친 후에 바로 책을 덮었다. 세계사같이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과목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디테일 ..
호수공원으로 가는 길에서 특정한 길목을 지날 때 마다 향기로운 꽃 냄새가 난다. 아빠한테 이게 무슨 냄새냐고 물었더니, 이건 라일락 꽃 향기라고 대답해주셨다. 옆으로 조금 가서 보니 분홍빛을 띄는 꽃들이 냄새를 풍기며 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얀색, 분홍색으로 얼룩진 라일락 꽃은 청순하고 참 예뻤다. 꽃이 너무 예뻐서 어떻게 찍어도 예쁘게 나올 것 같았다. 아빠는 어느새 이문세가 빙의되어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며~ “ 라고 흥겨운 노랫말을 부르며 저만치 가고 계셨다. 멋진 사진을 찍어서 아빠를 놀래켜 드리고 싶었다. 나는 카메라를 얼른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한참 꽃을 찍고 디스플레이로 사진을 봤는데 꽃이 예쁘게 나오긴 했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진이 그냥 “이건 라일락 꽃입니다”라고 마치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