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자료실/아빠와 아들의 사진산책 (23)
빛으로 그린 세상
금요일 저녁, 내일이면 주말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신나서인지, 흥분해서 축구를 하다가 바지가 터졌다. 교복 바지 엉덩이 부분이 크게 열렸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신나게 축구를 했다. 땀에 흠뻑 젖었는데, 이상하게 아랫도리가 시원해서 나중에 알아차렸지만 이미 많은 친구들이 그 모습을 봤을 생각을 하니 너무 민망했다. 후드를 벗어서 허리에 감싸고 바지의 터진 부분을 가려서 위기는 모면했지만, 민망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토요일에 책을 읽는데도 계속 그 전날의 일이 생각나서 집중이 잘 안 되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서, 나는 모처럼 카메라를 집어 들고 밤에 사진 산책을 나갔다. 산책은 밤에도 많이 나가보았지만, 카메라를 들고 나간 적은 처음이었다. 인공 조명이 호수공원을 환히 비추고 있었고, 많은 사..
언젠가 잡지에서 서울 한복판에 자동차들이 지나가면서 그 불빛들이 남긴 궤적이 만들어낸 멋진 사진을 본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나도 그런 멋진 ‘궤적 사진’을 찍어보고 싶어서 밤에 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캄캄한 밤인데도 라이트를 켜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쌩쌩 지나가는 자전거 불빛이 남기고 가는 그 궤적들을 사진으로 담아 내면 정말 멋진 사진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사진을 찍기 위해서 ‘조리개를 열어 놓는다’ 까지 밖에 몰랐던 나는 내가 원하던 캄캄한 호수공원의 야경 안에 빛의 궤적들이 그린 멋진 그림을 얻지는 못했다. 자전거가 너무 빨리 지나간 탓인가? 아니면 불빛이 너무 약해서 그런가? 다양한 의문점이 들었고 혼자서 해결해 보려고 이리저리 다른 시도를 해봤..
준우야 아빠가 지난봄에 선물한 카메라(니콘 D3100) 맘에 드니? 비싼 카메라는 아니지만 사진을 시작하는 너에게 좋은 동반자가 될 거야. 아빠가 사진을 처음 접한 이후 직업으로 20여년을 지내는 동안 많은 카메라를 사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좋은 카메라는 정을 가장 많이 나눈 카메라(니콘 FM2)였던 것 같아. 물론 지금 쓰고 있는 최첨단 디지털 카메라에는 성능과 편리함에서 비교할 수 가 없지만 오랜 세월 함께 하면서 손때가 묻은 당시의 필름카메라가 아직도 제일 좋은 카메라로 기억돼. 물론 그 카메라와 함께 ‘가평상공의 UFO출현’ ‘목숨 건 도강’등 전국을 들썩일 정도의 특종도 많이 했지. ^ ^ 아빠가 처음 사진기를 접한 건 아빠의 아버지 카메라였어. 교사이셨던 할아버지는 성격이 꼼꼼한 분이시라 카메라를..
밤새 배가 아파서 설사를 하며 잠을 뒤척였다. 전날 밤에 먹은 치킨이 뱃속에서 부활해서 뛰어다니며 콕콕 찌르는 것 같이 아팠다. 새벽에 눈을 뜬 후 바람을 쐬러 베란다로 나갔다. 창밖을 바라보니 환상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뽀얀 안개가 바닥에 깔려서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멋진 풍경 사진들 중에서 안개가 껴있는 풍경은 훨씬 멋지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이 찬스다. 배가 아팠지만, 멋진 사진을 위해서 이정도 복통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당장 옷을 갈아입고, 카메라를 챙긴 후 아빠를 흔들어 깨웠다. 잠이 덜 깬 아빠와 호수공원에 도착하였다. 안개가 낀 모습이 적나라게 드러나는 아파트 위에서 바라보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지만, 안개 속에서 ..
평소 길을 걷다가 발목이 간질거려서 내려다 보면 조그마한 풀들과 꽃들이 그 범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겨우 내 발목까지 밖에 미치지 않는 풀들이나 꽃들을 별로 심중하게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어라, 못 보던 풀이네”, “예쁜 꽃이네”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았었다. 가끔 귀엽거나, 사연이 있는 것 같은 꽃을 보면 사진으로 담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연신 고개를 떨구고, 허리를 굽혀도 사진은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에잉, 한낱 조그마한 꽃 따위. 원래 별로인데 사진으로 담으려 해도 오죽하겠어” 라며 포기를 해버렸다. 오늘도 산책을 하던 중 어김없이 귀여운 꽃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어차피 사진으로 담아도 예쁘게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아빠가 갑자기 “그..
“무조건 다 나오게, 무조건 넓게…” 나는 사진을 찍기 시작할 때부터 무조건 넓게 보고 사진을 찍는 습관이 있었다. 욕심을 부리면서 더 많은 것을 한가지 사진에다가 담으려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무조건 다양한 색이 나오고, 많은 사물들이 나와야 예쁜 사진이다’라는 생각이 머리 한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원래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보는 성격 탓일까? 항상 시험공부 할 때도 보면 나는 큰 그림을 보고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 공부를 하곤 했다. 책을 펼치고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쭈우욱 훑고 큰 틀을 이해한 후 “공부 다했다!”고 외친 후에 바로 책을 덮었다. 세계사같이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과목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디테일 ..
호수공원으로 가는 길에서 특정한 길목을 지날 때 마다 향기로운 꽃 냄새가 난다. 아빠한테 이게 무슨 냄새냐고 물었더니, 이건 라일락 꽃 향기라고 대답해주셨다. 옆으로 조금 가서 보니 분홍빛을 띄는 꽃들이 냄새를 풍기며 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얀색, 분홍색으로 얼룩진 라일락 꽃은 청순하고 참 예뻤다. 꽃이 너무 예뻐서 어떻게 찍어도 예쁘게 나올 것 같았다. 아빠는 어느새 이문세가 빙의되어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며~ “ 라고 흥겨운 노랫말을 부르며 저만치 가고 계셨다. 멋진 사진을 찍어서 아빠를 놀래켜 드리고 싶었다. 나는 카메라를 얼른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한참 꽃을 찍고 디스플레이로 사진을 봤는데 꽃이 예쁘게 나오긴 했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진이 그냥 “이건 라일락 꽃입니다”라고 마치 설..
산책을 하며 사진을 찍을 때 마다, 카메라 화면에 떠있는 “1/125, 1/250” 이 뭔지 항상 의아했었다. 설명서에 셔터 속도라고 명시가 되어 있었지만, 셔터에 한번 “깜빡!” 하면 사진이 찍히는 것이지, 무엇 하러 그 “깜빡!” 거리는 속도까지 조절을 해야 하나 싶었다. 평온한 일요일 아침에 산책길에 오른 나는, 아마도 날씨가 많이 포근해 져서 인지, 많은 사람들이 조깅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호수공원을 유유히 순회하는 모습을 보았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낯선 사람들이, 오늘 따라 자전거 타는 아저씨의 종아리 근육이 돋보였고, 한 발 한발 내딛으실 때 마다 씰룩씰룩 거리는 조깅하는 할아버지의 “노쇠하신 분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팔 근육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변태적인 동기가 아..
“바스락, 바스락” 놈이 또 나타났다. 나는 숨을 죽였다. 혹시 놈이 들을 세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내딛으며 놈에게 접근을 하였다. 드디어 잡았다 이놈!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찰칵!” 저격 라이플 같은 망원 렌즈를 착용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놈과 사투(?)를 벌인 지 30분 후에야 드디어 놈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평소에 산책을 다니며 수많은 참새, 까치 그리고 청설모를 발견하여 사진기에 담으려고 해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 대면, 이미 저만치 도망가 있거나, 알아채지 못하게 멀리서 찍으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점처럼 나와서 나는 그 역동적인 동물들을 찍을 생각을 일찍이 단념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빠가 망원 렌즈를 빌려주었다. 내 18-55m..
사방이 어둡고 고요하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새벽이라서 그런지 너무나 조용하다. 정적이 흐르는 고요함을 헤쳐 나가며 마침내 연꽃으로 덮여있는 호수에 도착하였다. 그 넓은 호수가 다 연꽃으로 덮여있는 모습이 신기해서 나는 카메라를 빨리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확인해 본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시 카메라를 들고 해가 뜨기 직전 호수의 멋진 광경을 계속 찍었다. 나는 사진을 확인하고 내가 찍은 사진들이 다 한결같이 공통점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또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왜 사진들이 다 푸르딩딩하지?” 분명히 눈으로 본 호수는 그러지 않았는데, 내가 찍은 호수의 풍경 사진들에는 모두 선한 푸른 빛이 감돌고 있었다. 혹시 카메라가 고장 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