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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버들개지 형제입니다. 솜털에 쌓인 체 모진 겨울을 이겨낸 녀석들입니다. 남녘에서 불어오는 훈풍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분주해질 때 녀석들도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켭니다.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버들개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봄볕에 반짝이는 하트가 지치고 힘든 우리 마음을 다독이며 따듯하게 어루만져 주는 듯합니다.
멀리 능선 위로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이 순간만은 삼라만상이 숨을 죽이는 듯하다. 마침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솟아오르는 붉은 덩어리. 어둠과 추위를 헤치며 산등성에 올라선 사람들. 일제히 환호성과 함께 희망찬 마음으로 저마다의 새해 소망을 빌어본다. ‘새해에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화해와 발전을 이루는 한 해가 되게 하소서!’ 덕유산 향적봉
여든 어머니께서 담근 ‘자식 사랑’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저마다 월동 준비로 분주합니다. 우리 집도 김장이 끝나야 한 해를 갈무리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김장을 그만하자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든을 넘긴 어머니는 홀로 배추를 심고, 가꾸고, 고집스럽게 김장을 이어가십니다. 어머니는 자식들과 지인들에게 김장을 나눠주고 보람을 맛보고 싶으셨던 겁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니까요. 어머니, 잘 먹겠습니다.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연보랏빛으로 가을 들머리를 물들이던 벌개미취 꽃이 어느덧 백발이 되었습니다. 자식을 멀리 보내는 애끓는 부모마음 처럼 뽀얀 솜털씨앗을 잔뜩 움켜쥔 채 좀처럼 놓지 못합니다. 한차레 세찬 바람이 불자 더는 미련없이 씨앗을 훌훌 날려보냅니다. 솜털에 싸여 산으로, 들로 날아가는 여린 생명들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내년에 보랏빛으로 우리를 반길 것입니다. 희망이 품었기에 꽃은 활짝 피었을 때보다 새생명을 떠나 보낼 때 더 아름다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 글 김선규기자
폭염에 아랑곳 않고 연잎 위에서 실잠자리 한 쌍이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가느다란 몸통을 구부려 서로의 마디를 파고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자연의 메시지를 실잠자리가 온몸으로 전해주는 것만 같습니다. 입추입니다.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 사랑으로 채우는 가을이길 기대해봅니다.
우연히 새둥지를 발견하고 살며시 다가서다 어미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순간, 새도 놀라고 저도 놀랐습니다. 까만 두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알을 품고 있는 어미 새는 꼼짝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작고 여린 몸으로 세상을 향해 겁 없이 맞서는 당당하고 거룩한 모성(母性)이었습니다
너무 흔해 눈여겨보지 않지만 봄이면 어김없이 집 앞 도로에 노랗게 피어나는 꽃.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혀 있어도 한줌 흙이 있는 곳이면 꿋꿋하게 피어나는 꽃. 아무리 억눌리고 짓밟혀도 봄이 오면 다시 피어나는 민초를 닮은 꽃 ‘꽃다지’입니다.
돌돌돌돌... 겨우내 꿈적 않던 얼음장 속에서 봄의 교향악이 흐른다. 종종종종... 겨우내 목말랐던 물까마귀 겨울을 오가며 부지런히 봄을 전해 나른다. 겨울이 깊을수록 어느덧 봄은 우리 곁에 성큼 다가서고 있다. 오대산에서 봄을 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