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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경황이 없어 끼니를 놓쳤다. 어머니가 시골집 마당에서 쓰러지셔서 병원 응급실까지 내달리며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입원까지 마치고 한숨을 돌리고 나니 하루해가 다 갔다. 갈증과 허기가 동시에 몰려왔다. 병원 근처 식당 구석에서 혼자 설렁탕을 먹고 있었다. 뜨거운 국물이 타들어 가던 속을 채워주었다. 몇 숟갈 뜨다가 국물 위에 떠오른 하트 모양 파 두 조각에 눈길이 머물렀다. 한동안 그 모습을 보는데 뜨거운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아닌 척, 괜찮은 척하며 묵묵히 견뎌왔는데…. “얘야, 괜찮다. 어서 먹어.” 고통 속에 신음하면서도 도리어 자식을 위로해 주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겨울비가 장마처럼 내린다. 마지막까지 가을을 붙잡고 있던 단풍잎들이 속절없이 떨어진다. 어느 애들은 화단위에서 꽃과 어우러지고 어느 애들은 하수구 철장을 꽃처럼 장식했다. 그리고 돌계단 내려앉은 단풍잎들은 ‘절규’ 하며 뭉크 아저씨를 깨운다.
가을을 오랫동안 붙잡고 싶어 단풍잎들을 책속에 끼워두었습니다. 책갈피에서 잘 마른 단풍잎들이 시골집 사랑방 낡은 격자문 위에서 오후 햇살을 받으며 다시 피어납니다. 어릴 적 손자들이 들락거리는 문은 오래 가지 못해 할머니는 창호지를 덧대 마른 풀꽃이나 단풍잎 등을 넣으셨습니다. 궁핍함 속에서도 삶의 여유를 잊지 않으셨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유년의 추억과 함께 피어오릅니다.
코로나를 잘 이겨낸 두분의 어머니를 모시고 동해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들은 오래간만의 여행으로 사돈을 떠나 친구처럼 좋아하십니다. 시리도록 맑고 푸른 하늘이 어머니들의 여행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행이란 단어를 잊고 사셨던 어머니들이 무척 설렜나 봅니다. 머리도 짧게 자르고 염색을 해서 한층 젊어 보이십니다. 장모님은 옷을 새로 사고 파마도 하셨습니다. 내색은 안했지만 오래 전 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셨다고 합니다. "다시는 바다를 못 볼 줄 알았는데..." 아흔이 넘으신 장모님이 바다를 바라보며 감격해 하십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시던 어머니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지금은 돌봄 대상이 된 두 분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책갈피에 끼워두었던 단풍잎들이 사랑방 창호문 위에서 오후 햇살에 다시 피어납니다. 두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평화가 찾아듭니다.
고동색 알밤 삼 형제가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여름내 뾰족한 가시로 무장하고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열매를 꼭꼭 품고 키우던 밤나무들입니다. 급한 마음에 억지로 밤송이를 털어서 알밤을 꺼내면 가시를 세우며 쉽게 열매를 내주지 않던 밤나무가 찬바람이 불자 순순히 열매를 내어 줍니다. 무르익는다는 것은 참고 견디어 내는 것, 그리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란 진리를 밤나무에게 배웁니다. 인생의 가을이 왔건만 아직 가시를 내세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유난스러웠던 날씨에도 풍성한 열매를 맺고 깨달음까지 선물한 밤나무가 고맙습니다.
가는 여름이 아쉬웠나봅니다. 공원 주변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다람쥐가 ‘득템’한 아이스크림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인기척도 아랑곳 않고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과 눈을 맞추고 앙증맞은 혀를 내밀며 먹는 모습이 사뭇 진지합니다. 녀석의 꿀맛 같은 순간을 방해 할까봐 가만히 숨죽이며 바라봅니다. 새끼들 걱정, 도토리 모을 걱정……. 다람쥐라고 근심이 없을까마는 그래도 우연히 찾아든 행운을 즐기는 이 순간, 다람쥐는 행복해 보입니다. 녀석 입맛 변할까 괜한 걱정도 되지만 힘겨운 우리의 일상에도 문득 다가올 달달한 순간들을 그려보며 혼자 미소 짓습니다.
삼복더위에 자벌레가 길을 나섰습니다. 거꾸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한껏 등을 굽혀 몸을 길게 늘이기를 반복하여 앞으로 나아갑니다. 힘겹게 여름을 나는 자벌레를 들여다보다 하루하루 숨쉬기조차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자벌레는 자벌레나방의 애벌레입니다. 언젠가는 번데기의 허물을 벗고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날겠지요. 시절인연을 기다리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자벌레가 삶의 스승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도 숲속의 수행자 자벌레는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여름 속을 가고 있습니다.
지난겨울 비둘기 한 마리가 제 마음속으로 날아 들어왔습니다. 날개 끝에 두 줄의 갈색 무늬가 있는 비둘기입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 나무 그네에 앉아 물끄러미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종종거리며 먹이를 쪼고 있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한쪽 발가락이 모두 잘리고 발목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균형이 맞지 않는 다리로 뒤뚱거리며 이리저리 힘겹게 걷는 모습에 콧등이 시큰거렸습니다.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을까?” 그때부터 습관처럼 그곳에 가면 그 비둘기를 찾게 됐습니다. 가끔 마주치는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한테 뒤처지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마음이 컸는데 그 당당한 모습에 저도 위로를 받았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
먼 산에 동이 트자 밤새 잠들었던 대자연이 기지개를 켭니다. 투명한 아침 햇살이 굽이굽이 산자락을 어루만지고 이슬 머금은 신록에도 햇살이 고루 퍼집니다. 이른 아침부터 백구 세 마리가 들판을 신나게 뛰어다닙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제 마음도 강아지처럼 뛰놀던 유년시절로 돌아갑니다. 우리 아이들도 저 강아지들처럼 마스크 없이 신나게 뛰어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만물이 꿈틀거리는 이 신록의 계절에 마스크로 동심을 가리고 있으니 얼마나 갑갑할까…. 아이들아 조금만 더 힘내. 잘 견뎌주는 너희들이 참 대견하고 고맙다. 사진·글 = 김선규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