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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기다림이 컸던 만큼 모처럼 내리는 비가 반갑다. 목말랐던 대지가 촉촉하게 젖어들고 시들했던 풀과 나무들도 생기를 되찾는다. 재잘거리던 새들은 집으로 돌아갔는지 북적이던 공원길이 고요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이는 대로 유유자적 연못 위를 노니는 소금쟁이 두 마리. 작은 원이 큰 원이 돼 끝임없이 번져가는 물결을 보니 닥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내 마음속 같다.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으니 언제 소금쟁이처럼 근심 따위 툭툭 털어버리고 가벼워질 수 있을지...
오랫동안 새벽 출근을 하다 보니 아침밥을 거를 때가 많다. 일터로 허겁지겁 가는 대로변 가로수에 흰 눈이 소복이 내린 듯 새하얀 꽃들이 만개했다.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 꽃이다. 밤새 숙취와 허기로 배 속이 요란하다. 차는 막혀 꼼짝을 안 하고 멍하니 이팝나무 꽃을 바라보며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5월은 보릿고개가 절정이었다. 식구는 많았고 먹을 것은 귀했다. 허기는 늘 공기처럼 친근했고 흰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 꽃을 보기만 해도 배 속이 요란해졌다. 누군가에는 아름다운 꽃으로 누군가에는 아련한 추억 속으로 출근길 이팝나무 꽃이 수많은 사연을 안고 무성히도 피었다. ■ 촬영노트 요즘 전국을 흰 물결로 수놓은 나무가 이팝나무와 아까시나무다. 나무 꽃이 밥알(이밥)을 닮았다고 부른 이팝나무는 예로부터 꽃이 많..
어머니가 식탁에서 무언가에 열심이시다. 다가가 보니 당신이 좋아하는 꽃그림에 정성스레 색칠하고 계신다. 어머니의 손길을 받은 꽃들이 공책위에서 화사하게 피어난다. 밭일을 하시며 틈틈히 꽃가꾸기를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지난겨울 대퇴골을 크게 다쳐 걷기조차 힘에 부쳐하셨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한동안 힘드셨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신 어머니가 이제는 직접 심고 가꾸는 대신 그림으로 꽃을 키우신다. 색감이 곱고 아름답다. 그림을 배워 본적이 없지만 76세에 화가가 된 미국의 모지스 할머니 애기를 들려드리며 어머니도 화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아이고, 이 나이에 뭘 하겠니.” 수줍게 웃으시지만 싫지는 않으신 것 같다. 어머니는 오늘도 호미대신 색연필로 꽃을 가꾸고 계신다. 어머니가 호미대..
공원 돌계단을 오르다 발밑에서 반짝이는 노란 민들레. 보랏빛 제비꽃도 그 옆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점심을 마치고 산책하던 직장인들, 혹여 밟을까 발걸음을 주춤하다 이내 미소 짓는다. 그 어느 곳이든 한 줌의 흙을 움켜쥐고 당당하게 피어나 온몸으로 봄을 노래하는 들꽃들. 척박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었기에 모진 겨울을 견딜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시름하며 회색 겨울이 머물러 있던 우리 마음속에도 희망의 봄이 오고 있다. ■ 촬영노트 모든 생명체는 아무리 열악한 상황에서도 주어진 삶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각자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 길을 가다 콘크리트 바닥의 작은 틈새로부터 빛을 찾아 나오는 노란 민들레를 보면 마음이 환해진다. 길에서 마주하는 들꽃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 보자..
겨울의 그림자가 아직 가시지 않은 깊은 산속. 찬바람에 여린 솜털을 떨면서도 봄소식을 전해주려 언 땅 비집고 나온 가냘픈 노루귀.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다만 자기 자신으로 피어나서 최선을 다해 머물다 가는 아름다운 삶. 이런 노루귀를 닮은 민초들이 이 땅의 곳곳에서 말없이 피고 지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봄봄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노루귀라는 정다운 이름은 꽃이 지고 새로 나온 잎 모양이 노루의 귀와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
미세먼지 끝자락에 찾아든 노을이 반갑다. 마스크를 끼고 뛰어가는 중년에게도 서로만을 바라보던 청춘에게도 붉은 기운이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럽게 스며든다. 노을과 함께 찾아든 땅거미에 나무도 사람도 자신의 빛을 내려놓는다. 하루 종일 미세먼지처럼 붙어 다니던 근심, 걱정 황홀한 빛에 빨려 들어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코로나로 지친 마음, 노을이 전하는 위로에 가족들에게 사진과 함께 격려문자 한 통 건네 본다. “오늘도 수고했어!” ■ 촬영노트 길을 가다 예쁜 노을을 보면 행복하다. 눈길, 발길은 물론 마음마저 붙잡는다. 코로나19 확산과 미세먼지로 공원마저 발길이 뜸한 저녁. 신도시를 품고 있는 호숫가를 산책하다 아름다운 노을을 만났다. 행운이다.
봄은 고양이를 닮았다. 조용하고 부드럽고 날카롭게 시나브로 다가온다. 코로나 확진으로 집콕 생활 일주일째, 무감각해진 시간 속에 허우적거리는 틈으로 따사한 햇살 한 줌이 거실에 스며든다. 나른한 눈으로 졸고 있던 고양이. 어느새 자기보다 커진 그림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귀를 쫑긋 세우고 노려본다. 입춘은 지났지만 발코니 밖은 아직 꽁꽁 얼어 있다. 모든 것이 숨죽이고 있는 듯하지만, 고양이처럼 봄은 조용하고 부드럽고 날카롭게 우리 곁에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다.
삶의 에너지가 바닥날 때 전통시장은 좋은 에너지 충전소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면 새로운 삶의 의욕이 일곤 한다. 그중 꽃시장은 향기까지 덤으로 주니 일석이조다. 꽃장사 대목이라는 졸업식 시즌이라 남대문 꽃시장에 많은 사람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인적이 뚝 끊긴 채 향기로운 침묵만이 흐른다. “가장 바쁜 철인데 이러고 있네요. 작년만 해도 견딜 만했는데 올해는 너무 막막해요.” 30년 넘게 이곳에서 꽃과 사는 최명숙(70)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생기가 없다. 계속되는 코로나19 여파로 화훼농가는 하나둘 무너지고 졸업식 등 행사가 축소되거나 비대면으로 전환돼 어려움이 더하다고 한다. 꽃 한 다발 사 들고 나서는데 코끝이 찡하다. 매서운 추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신문지에 싸인..
경황이 없어 끼니를 놓쳤다. 어머니가 시골집 마당에서 쓰러지셔서 병원 응급실까지 내달리며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입원까지 마치고 한숨을 돌리고 나니 하루해가 다 갔다. 갈증과 허기가 동시에 몰려왔다. 병원 근처 식당 구석에서 혼자 설렁탕을 먹고 있었다. 뜨거운 국물이 타들어 가던 속을 채워주었다. 몇 숟갈 뜨다가 국물 위에 떠오른 하트 모양 파 두 조각에 눈길이 머물렀다. 한동안 그 모습을 보는데 뜨거운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아닌 척, 괜찮은 척하며 묵묵히 견뎌왔는데…. “얘야, 괜찮다. 어서 먹어.” 고통 속에 신음하면서도 도리어 자식을 위로해 주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키다리 나무들이 형형색색의 뜨개옷을 입고 있다. 찬바람이 불고 거리에는 낙엽이 뒹구는 쓸쓸한 계절이지만 가로수들이 알록달록 옷을 입고 있는 경기 과천시 문원동 도로는 나무들의 축제가 벌어진 듯하다. “너무 예뻐요.” 30년 경력의 야쿠르트 아줌마 이영옥(70) 씨가 이곳을 지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며 환한 표정을 짓는다. 분홍색 옷을 입고 일하는 모습이 나무들이 입은 뜨개옷과 잘 어울린다. 나무들이 입고 있는 옷을 만져보니 한 코 한 코 정성껏 뜨개질한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작은 정성들이 연결돼 나무가 따뜻해지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훈훈해졌나 보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거리에 겨울나무들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 촬영노트 뜨개질로 나무에 옷을 입히는 ‘트리니팅(trees knit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