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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무덤의 형상들/조은 집들이 저만치서 무덤의 모양새로 늘어서 있다 마을을 둘러산 산들도 무덤의 형태를 갖고 있다 무덤을 더듬으며 땅 속으로 내려가는 뿌리들 무덤을 거쳐 나오는 여린 줄기들 하늘을 이고 진 사람들 무덤의 형상들 무덤까지 가는 생의 길이 유선처럼 따뜻한 곳에서
바다에 시간을 곶고/문정희 시간은 뙤약볕처럼 날카로웠다 두럽고 아슬아슬하게 맨 살 위에 장대를 꽂기도 했다 그래서 삶은 때때로 전쟁을 연상시켰다 하늘아래 허리를 구부리는 것은 굴욕이 아니다 이 빗발치듯 내려꽂히는 시간 속에 허리를 구부리고, 서로 이마를 맞대고 생명과 생명은 이어져왔다 바다가 밀려오고, 밀려나가고 또 가을이 오고, 봄이 오고 그러므로 우리가 허리를 구부려 줍는 것은 차라리 영원한 허기인지도 모른다 허기가 바다를 다시 채운다 허기가 지상에 가을을 불러온다 마치 병정들처럼 시간이 맨살 위로 장대를 들고 다가드는 시간 문득 발아래 깔리는 무수한 별들을 본다
나를 낳은 달/문정희 나를 낳은 건 흙이나 학교가 아니었다 떠나가라 떠나가라 소리치며 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달, 그녀의 깊은 주름살을 오늘은 어머니라 부른다 맨드라미 같은 붉은 벼슬의꿈과 날마다 알을 낳는 힘과 밤마다 사랑을 만드는 눈물을 그녀가 아니면 어디에서 배웠으랴 모든 생명을 온기로 품어 살아있는 대지의 체온 모든 상처를 맑게 씻어 결국은 빛나는 생명의 눈부심을 나를 낳은 달, 그녀가 아니면 어디서 보았으랴 지난 여름 매미채 하나씩 들고 도회로 떠난 아이들은 고향에 쉬이 돌아올 수 없는 거인이 되었다지만 그래서 기쁘고 쓸쓸한 나를 낳은 달 가을 창가에 홀로 핀 꽃처럼 환환 웃음으로 떠오르고 있다
감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고향/유안진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가야 했던 동네 까닭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 장마 끝 무너지다 남은 토담 위에 걸터앉은 몸 무거운 호박덩이 보름달보다 밝은 박덩이가 뒹구는 방앗간 지붕에는 빨간 고추밭 어느 것 하나라도 피붙이가 아닐 수 없는 것들 열린 채 닫힌 적 없는 사립을 들어서면 처마 밑에 헛기침 사이사이 놋쇠 재터리가 울고 안마당 가득히 말라 가는 곶감 내음새 달디 단 어머니의 내음새에 고향은 비로소 콧잔등 매워오는 아리고 쓰린 이름 사라져가는 것은 모두가 추억이 되고 허물어져 가는 것은 모두가 눈물겨울 것 비록 풍..
전설도 하 많은 고향 들녘뜸/유안진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고향은 신비로운 동화의 세상 그래서 꿈도 희망도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세상 산봉우리, 고갯마루, 산골짜기, 냇물과 바윗돌, 한 그루 나무에 까지 전설을 품어 신비로운 힘과 꿈과 위로과 웃음의 비결이 되었지 집채 만한 거북이가 마을로 기어드는 거북바위마을도 입향조가 이름하신 구입리 씨족마을 거북처럼 오해 살며 번성하는 장수마을 거북바위는 생남 등과 와 승진 합격 치병들 어던 소원도 다 이루어준다는 거북바위는 주민의 신령스런 종교가 되어, 거북들, 거북뜸, 거북봉, 거북재, 거북골, 거북내, 거북다리목... 조상들의 함자도 구봉이 구형이 구문이 구동이 구호 구식 구놈이 구순이... 그 어르신네 고손자들 아명도 거복, 거남, 거북, 거돌, 거식, 거..
거기 빛의 투망이 보인다/신달자 나는 귀여리를 안다 새벽에 다시 태어나는 조선시대 벼슬에서 물러나서 귀여리의 새벽 강을 나는 안다 아름답게 돌아온다는 한 사내가 배를 몰고 귀여리의 새벽 강을 나는 안다 대문을 열 듯 아침을 열고 있다 물안개가 머리 풀어 꿈인 듯 덮는 세상의 모든 아침은 여기서 시작이다 나는 안개가 되고 싶은 새벽 강에 나가 꾹 입 다물고 노를 잡은 두 손에 온 몸 풀어 풀어 너울 너울 강에 덮고 꽉 힘을 준다 형태 없이 새벽에 사라졌다가 저기 빛의 투망이 보인다
저 녹슨 철책은 말이 없다/신달자 오마니! 속초 동해바닷가에 온 몸이 찢어져라 목 놓아 부르는 터를 잡은지 반 백년 한의 핏덩이를 먹고 오늘도 기척없이 저 철책은 저리도 질기더냐 멀리 짓무른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반 백년의 붉은 눈물을 먹고 하늘도 귀먹어 보이는 멍청한 날 저 철조망은 저리도 쎄기만 하더냐 장병건 할아버지는 사라지지도 무너지지도 않으면서 한잔 낮술에 울음이 익어 아직도 그것은 말이 없고 오마니! 오마니! 고향이 지척이라는 이유하나로 또한번 목이 터진다
시외버스를 타고 / 이상희 내 가을은 시외버스를 타고 고향과 타향 사이 국도를 무겁게 흔드리는 진자(振子), 감지도 뜨지도 못하는 눈을 차창에 대면 부부부 날선 햇살을 뭉개고 섰는 억새 으악새가, 에고에고 한평생 울 일 없는 허수아비가, 오색 찬란한 산빛보다 먼저 앞을 가로막고 나는 가만히 앉은 채로도 발이 퉁퉁 붓도록 길을 잃고 헤맸습니다 이제 기나긴 밤의 날들이 오고 폭설이 내리고 우리의 가난도 일직 잠들겠지요 슬픔도 진자도 멈출 것입니다.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냐 하나 / 김명리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 이 한 장의 스냅사진 속의 역광에 쓸리는 가을 산빛 한낮의 졸음처럼 때아닌 설움처럼 숨통에 하나 가득 대번에 몰려오는 이 뭉클함 사람의 한 생애를 사무치게 버팅기는 이 산빛 이 물 빛 이 바람 속을 산그늘이 풀어헤친 비밀한 행낭의 어디, 어디쯤이라고 말해야 하나 어쩌면 여기쯤에서 머무르고 싶다고 말해도 좋으리 한 마지기 하늘의 수줍은 논배미 속으로 탕탕히 내다거는 씨옥수수 생량머리 바람이 주저 없이 얼싸안는 저 나이테 면면한 세월의 요만한 남루쯤이야! 단숨에 내달려가 와락 안기고 싶은 괄게 지핀 인정의 훗훗한 아궁이 속 같은 여기, 여기쯤을 내 마음이 닿고 싶은 고향이라고 말해도 좋으리 꽉 다문 입술로 사랑이라 말해도 좋으리